예부터 저산팔읍 중 으뜸이었던 한산
이목만 아니라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어던지고픈 무더운 여름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땀이 흘러내리고, 겨우 하나 걸친 옷은 그 땀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는데…. 아, 선생이 입은 저 옷은 왜 이리도 시원해 보일까. 귀밑머리나 흔들고 갈 정도로 살짝 부는 잔바람에도 나풀거리는 것이 몸으로부터 한주먹씩 여유 있게 떠 있는데, 과연 옷감의 존재나 느껴지는지 궁금하다. 움직일 때마다 ‘사르르’ 들리는 마찰음마저 더위를 저 멀리 밀어내는 생모시적삼을 입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67) 선생은 베틀 앞에 앉았다.
“입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사람까지도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모시옷이에요. 이 계절에 모시옷 이상 가는 게 어디 있나요.” 발로는 끌신을 당겨 잉잇대를 올리고, 손으로는 바디를 눌러 치자 한 줄의 올이 보태졌다. 선생의 저 탐나는 적삼은 이런 작업을 수만 번도 더 해 만든 결과물이다. 보기에는 한없이 좋을지 모르지만, 모시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옷감이다.
“어떻게 그걸 다 할까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나요. 그저 한 과정씩 거쳐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 필의 모시가 손에 들려 있어요.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게 모시작업이예요. 마음이 급하면 올이 끊기거나 고르지 않게 나와요. 다 짠 모시옷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자세로 모시를 짰는지 알 수 있어요.”
모시는 본래 저마 또는 저마포라고 불리는 다년생 풀을 말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모시는 이 풀을 가지고 짠 옷감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시를 짜서 입고 수출하기도 했다. 모시풀은 습한 지역에 특히 잘 자라는데, 생육조건이 맞는 저산팔읍에서 모시 산업이 흥했다. 서천군의 한산면·비인면·서천읍, 보령군의 주포면· 남포면, 부여군의 임천면·홍산면, 청양군의 정산면이 여기에 속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알아주는 것이 한산이었다. 특히 이곳의 모시는 극히 가늘고 고와서 ‘한산모시’라는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한산모시는 생모시와 백모시가 있다. 생모시는 물을 들이지 않은 것이고 여기에 옥색·치자색·분홍색 등을 염색해 사용했다. 백모시는 생모시를 하얗게 표백한 것이다. 백모시는 비단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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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모시옷. 바람이 불 때마다 찬 기운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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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방연옥 선생의 모시짜기는 비록 더디지만 정성만큼은 최고다.
(우)서산 한산모시관에서는 전통 모시의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복잡하고 섬세한 모시작업
세상 어떤 것도 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지만, 한 필 모시의 완성과정을 보면 그 수고스러움에 존경심마저 들 정도다. 모시를 짜기 위해서는 먼저 모시풀을 베야 한다. 수확은 1년에 3번 한다. 초수·이수·삼수라 하는데 초수는 6월 20일에서 말경, 이수는 8월 중순, 삼수는 10월 초에 한다. 모시풀은 냉해만 조심하면 이듬해에도 계속 자란다. 그래서 마지막 수확이 끝나면 지푸라기 따위로 그 자리를 따뜻하게 덮어준다. 냉해와 함께 가뭄은 가장 큰 적이다. 모시풀은 1.5~2m 정도로 자란다. 하지만 가물면 잘 크지 않고, 마디도 덜 퍼진다. 따라서 좋은 품질의 옷감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모시풀 수확이 끝나면, 이것의 껍질을 분리해 속으로 태모시를 만든다. 네댓 번 물에 불려서 햇빛에 말아 너는 작업이다. 다음이 모시째기다. 태모시를 일정한 굵기로 쪼개는데, 이 과정에서 옷감의 품질이 반은 결정된다. 다 짼 모시는 이제 하나의 실로 연결되는 삼기 과정에 들어간다. 무릎에 실과 실의 끝을 연결해 타래를 만드는 것이다. 태모시서부터 삼기까지는 기계의 손을 빌리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워낙 복잡하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삼기에 이어서 날기·매기·꾸리감기 등 그 실들을 베틀에 거는 작업이 이뤄진다. 그 모든 게 준비되야지만 마침내 짜기가 시작된다.한산의 여자라면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모싯일을 도왔다. 고도의 집중과 숙련이 필요한 짜기는 어머니의 몫이었고, 나머지 허드렛일은 아이들의 차지었다. 모시를 벨 때는 남자들이 힘을 보탰다. “1980년 이전 기능보유자셨던 문정옥 선생님께 전수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모시를 짜기 시작했어요. 집 가까이 선생님의 댁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해온 가락이 있어서 어머니 돕듯하다가 이수자가 됐죠.” 하루에 두 시간 남짓씩 6년. 그렇게 모시짜는 방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우고 마침내 2000년 8월 20일 방연옥 선생은 스승의 뒤를 이어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조교를 두어 한산모시의 전통을 전수하고 있다.
방연옥 장인,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정성을 다하는 것
모시와 평생을 함께하는 동안 선생의 손은 베틀을 놀리느라 마디마디 굵어졌고, 무릎은 관절이 시리다 아우성이다. 그 가느다란 실에 집중하느라 눈도 많이 나빠졌다. 지난해에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안경에 의지한다. 몸이 아프다 하니 작업의 속도가 다소 느려졌는데, 쉬엄쉬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있다. 한창때는 일주일에 두어 필씩도 짰지만, 지금은 한 필 정도의 속도다. 열흘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은 느긋하다. 얼마나 빨리 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곱게 짜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 모시를 좀 보세요. 멀리서도 한눈에 분간이 가죠. 날림으로 짠 모시들이에요. 그에 반해 우리 한산모시는 올이 가늘고 곱죠. 베틀 한번을 놀려도 마음을 다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중국산은 모시까지도 전국의 시장에 유통되며 한산모시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시쳇말로 ‘싼 게 비지떡’이다. 몸이 좋아하는 한산모시에 비해 거칠어서 몸을 성내게 하는 것이 중국모시다. 한산모시는 마디 하나 없이 티 하나 없이 맑지만, 중국모시는 마치 대나무처럼 옷감 곳곳에 마디가 지고 올이 일정치 못하다. 한산모시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비치지만, 중국모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중국모시는 전국의 다른 모든 곳에서 유통되지만, 한산이 자리한 서천에서는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이제 한산모시는 한복의 재료를 넘어 여러 제품에 응용되고 있다. 이불, 커튼, 액세서리, 인형, 수의 등 다양한 곳에 한산모시가 쓰인다. 단순히 시원한 옷, 친환경 유기농 섬유라는 타이틀 외에 한걸음씩 현대적 경쟁력을 확보해가는 한산모시다. ![](/upload/logo_r[670][588].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