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천,
조화의 예술로 태어나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바느질을 해왔다는 김현희 선생의 입으로 보자기의 역사가 전해진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우리 규방문화의 역사이자 그녀의 삶 자체였던 보자기 이야기에 저절로 귀를 기울인다. “보자기는 곧 가방이기도 했고 짐을 나르는 운반 도구이기도 했고, 짐을 싸서 보관하는 보관함이기도 했었어요. 집집마다 보자기 없는 집은 없었으니까요. 그만큼 선조들의 삶부터 지금 우리의 삶까지 지속되는 아주 밀접한 생활도구였지요.” 우리 보자기는 주로 일상적인 생활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다양한 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도구로 역사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사물의 포장, 운반, 보관 등을 위해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보자기는 정사각형 천을 말한다. 주로 사각 천에 수를 놓거나 또는 옷 등을 지워 입고 남은 천을 기워 만든 조각보가 많았다. 보자기는 사용계층에 따라 궁보, 민보로 제작방법에 따라 조각보, 수보 등 사용방법에 따라 이불로, 밥상보, 책보 등으로 그 외에도 천과 문양의 유무 등에 따라 그 종류와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조선시대 들어 그 문양과 모양이 더 다채로워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보자기가 발달하게 된 까닭은 주거 공간의 협소함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보자기는 펴고 접을 때마다 신축이 자유로워, 보관하거나 운반할 때 용이했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작게 접어 둘 수 있었으므로 가재도구로서 기능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 보자기는 또 간편하고 안전한 운송수단이자 보호대로써 서양의 가방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더욱 기능적이었다. 가방과 상자는 물건에 따라 흔히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요하고, 일정한 크기 이상의 물건은 가방이나 상자에 들어갈 수가 없으나, 보자기는 어떤 물건을 싸느냐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정해져 가방이나 상자에 비해 융통성이 뛰어난 가재도구였던 것.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사용된 보자기. 선조들은 일부러 보자기 제작을 위해 천을 따로 구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궁에서야 수방나인들이 최상급의 비단에 화려한 수를 놓아 의례용, 장식용 등으로 만들어 사용했겠지만,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해 만들어 사용했다. 자투리 천을 이어 지은 게 조각보. 남은 천을 이용해 만들어 쓰던 보자기가 오늘날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독창적인 예술공예로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제 보자기는 생활도구라기 보다 옛것을 살려 재창조한 작품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예술공예로 지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다시 바라봐야 할 때다.
보자기에는 다양한 그림과 문양을 넣은 자수가 들어가는데 이를, ‘수보’라고 한다. 자수의 문양으로는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나무, 꽃문양이 가장 많고 학, 봉황, 공작, 나비 등이 그다음으로 많이 놓이기도 한다. 이밖에 꽃은 복을, 열매는 다산, 특히 다남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전체적으로 수보의 문양은 복락기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보의 기본 색상은 청·홍·황·백·흑으로, 음양오행설이 말하는 자연계의 기본색상인 오색이 주조색상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자기는 우리 선조들의 일상적 믿음과 행동에 밀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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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김현희 선생은 자수 놓는 실도 직접 염색해서 사용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은은한 멋을 낸다고.
자연에서 얻어지는 컬러는 언제보아도 자연스럽다.
(우)한땀한땀 자수를 놓을 때마다 우리 자연을 생각하고 우리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는 그녀. 오랜 시간 바느질에도 그녀는 골무를 끼지 않는다고 했다.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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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염색해둔 천들이다. 곱디고운 천연의 색들은 우리 것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닮았다.
수보, 조각보의 역사 재창조. 김현희 선생
김현희 선생의 스승은 조선의 수방나인으로부터 자수와 보자기 가르침을 배웠던 윤정식 선생. 이 윤정식 선생에게서 자수를 배웠던 어머니로부터 김현희 선생이 자연스럽게 자수를 접하게 되었던 것.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그녀의 자수 놓은 것을 본 윤정식 선생이 직접 가르치겠다며 김현희 선생을 작업실로 불러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수를 배우고 천을 기워 조각보 등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 “처음부터 보자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다 보니 남들보다 재주가 조금 더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한 가지를 정해 집중하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보자기, 조각보’였습니다. 유럽에 퀼트와 비슷하겠다 했는데, 보자기는 그 쓰임새가 다양하고 만드는 방법도 수천, 수백 가지로 아주 재미가 있었거든요.” 일상에서 평범하게 사용되었던 보자기를 지금의 예술작품으로 이끌어온 김현희 선생, 그녀는 그렇게 우연이 가져다준 필연적 삶을 살아왔다. 그녀가 40년 가까이 보자기와 자수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것’이 그저 좋아서였다고 했다. 보자기 안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모습이 좋았던 것. “특히나 수를 놓을 때 우리 문화, 우리 자연을 표현해내는 방법이 참 재미있어요. 중국의 자수처럼 기교가 많거나 또 사실적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고 해학적이죠.”
적게는 수십 장, 수백 장을 이어 기은 조각보는 무엇보다 컬러감과 구성력이 좋아야 한다고. 김현희 선생은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작품과 도안을 끊임없이 연구, 이제는 즉석에서도 조각보 구성이 가능해질 만큼 단연 최고가 되었다. 조각보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색의 조합. 그녀는 자신만의 컬러감을 내기 위해 천과 실의 염색도 직접 한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을 선생만의 비법으로 염색하여 오래 두면 둘수록 빛을 내는 조각보, 수보를 만들어내는 것. 이 역시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얻어지는 꽃과 열매, 나무, 풀 등에서 색의 아이디어를 찾는다고 한다.
김현희 선생의 작품은 미국 하버드대 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일본에서는 1994년 자수박물관장 허동화 선생의 소개로 작품이 전시된 후 보자기 바람이 불어 2002년에는 NHK가 35분짜리 보자기 만들기 특강을 방영하기도 했다. 자투리로 버려지는 천이, 한땀한땀의 바느질로 선생의 손에서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바느질을 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을 바탕으로 한 재창조’ “좋은 것으로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지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시 재창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역사 속의 그 무엇이 아닌, 지금 여기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말이죠.”
우리 문화에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을 복을 싸둔다고 한다. 그 옛날 보자기에 결혼 예물이며 이불이며 살림살이를 싸간 이유도 다 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 그게 무엇이든 감사의 마음을 오색 보자기에 싸 전해본다. 상대의 복을 기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더 커지고 따뜻해지질 터다. ![](/upload/logo_r[670][597].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