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
정호승
봄밤에 오늘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가다가
전동차 통로 바닥에 죽순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안국역에서 학여울역까지 가는 동안
사람들이 마구 짓밟고 가는데도 죽순은 쑥쑥 거침없이 자라
전동차 안이 푸른 대나무숲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멀리 담양 소쇄원 대숲에서 불어온 바람인가
사각사각 댓잎에 바람 스쳐지나가는 소리 들리고
한강의 야윈 불빛들이 저마다 댓잎에 앉아
쓸쓸히 웃으면서 흘러간 사랑을 이야기한다
전동차의 피곤한 바퀴를 쓰다듬어주는 저 허연 대나무 뿌리도
지난겨울을 견디기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시각장애인들과 같이
오랫동안 대나무 마디마다 쓰다듬으며 말없이 말했다
대나무가 거친 바람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것은
바로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내 눈물에도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어느 젊은 가장이 두 아들을 데리고 빙어낚시를 떠났습니다. 얼음에 구멍을 뚫고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한참을 지나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날은 춥고, 바람은 불고, 고기는 잡히지 않고 두 아들은 툴툴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얼음 밑의 물고기들이 너무추워서 돌아다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손을 모아 외쳤습니다.
“야, 물고기들아! 우리 집에 가면 따뜻한 물속에서 살 수 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새끼손가락만한 빙어가 한꺼번에 세 마리나 낚여 올라왔습니다. 셋이서 좋아라 하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봉직의 동시 <빙어낚시>를 산문으로 풀어본 겁니다.
한 편의 동시만큼 삶은 유쾌하고 아름답지만 때론 혹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고통이나 외로움, 쓸쓸함으로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많지요.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연들을 가슴 깊은 곳에 담고 각자의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지요.
시인은 아마 밤늦게까지 인사동 쯤에서 지인들과 모임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길에 시인은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을 봅니다. 늦은 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거나 외면한 채 전동차 안에 앉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둥지로 뿔뿔이 흩어져 고단한 하루를 접게 되겠지요. 그런데 시인은 전동차 안이 푸른 대나무숲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상상이겠지요. 옥죄는 일상으로부터 단숨에 벗어나게 하는 즐거운 상상입니다. 시각장애인의 지
팡이에서 시작된 시인의 상상은 거침이 없습니다. 댓잎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 대나무의 흰 뿌리까
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대나무 마디를 쓰다듬기까지 합니다.
대나무의 마디는 왜 생기는가요? 물이 끓는 온도, 즉 임계치 100도씨에 이르러야 물이 끓듯이 대나무의 마디는 곧 하나의 임계치이지요. 생장 과정의 한 단계인 마디, 그 마디를 넘어서는 과정은인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요. 일정한 간격으로 생기는 마디가 없으면 대나무는 자라지 못하고비비 꼬이다가 터져버릴 것입니다. 뭉툭하게 맺힌 부분, 거기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지요.추위와 시련을 견딘 눈물과 한숨이 있지요. 돌처럼 단단해진 슬픔의 덩어리가 있지요.
마디는 새로운 도약대가 되어 대나무의 성장을 돕습니다. 태양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가는 대나무의 푸른 열망은 언제 보아도 시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도드라지게하는 것이 바로 마디입니다.
대나무가 거친 바람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것은 바로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봅니다. ‘내가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 내 눈물에도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지요. 눈물에도 마디가 있지요. 어찌 보면 인간은 참 독합니다. 한 평생 살면서 온갖 고통과 맞서 싸우지만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불씨를 지펴나가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눈물에 마디를 세우는 일,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디는 결국 나를넘어서는 일이요, 보다 강인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니까요.
세인들에게 염세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살려는 의지라고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또 패배가 따르는 고통을 자발적으로 겪어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보다 성숙한 개체로 거듭나게 되니까요.
시인에게 마디는 곧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됩니다. 마디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디는 삶의 빛나는 훈장 같은 것입니다. 지금창밖의 많은 나무들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제 삶을 태워 몸을 덥히고 있습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지요.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가만히안아보면 분명 무슨 말인가를 들려줄 겁니다. 향기로운 나무의 속삭임에 귀기울이는 따뜻한 영혼을 기다려봅니다. ![](/upload/logo_r[670][883].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