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시동생과 함께 운영하던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화재보험조차 못 든 남편은 반쯤 넋이 나갔지요. 공장은 소실되었고 출고를 앞둔 옷과 창고에 있던 옷감까지 몽땅 불에 타버렸지요. 거래처에서 밀린대금을 받아 종업원들 월급을 해결해준 뒤 우리 가족은 당장의 생계가 막막할지경이었습니다. 그저 현상유지만 해오던 공장이라 벌어둔 돈이 있을 리 없었지요.
시부모님과 미혼인 시동생이 셋, 우리 부부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아홉이나되는 대가족이라 하루 소비되는 부식비만도 이만저만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가족, 친지, 이웃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가건물을 짓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때였지요. 하루 종일 사방으로 뛰어 다니느라 저녁이면 피골이 상접해 들어오는 남편과 시동생들을 보면서 여간 마음이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간당간당 버티던 생활비도 떨어졌고 쌀독도 바닥을 드러낸 날. 염치불구하고 단골 슈퍼마켓으로 향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할 때부터 줄곧 거래를 해오던 가게니 설마 야박하게는 안 하겠지…’몇 번씩이나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고 가게 문을 열었지요. 아마도 제 초라한 행색과 딱한 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써있었나 봅니다. 단박 제 마음을 읽은 주인아주머니는 흔쾌히 쌀 두 포대와 밀가루, 계란 등 부식거리를 외상으로 내주시더군요. 매달 말일에 계산을 하기로 하고 외상으로 갖다 먹은 쌀값이랑 부식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외상이면 사돈집 소도 잡아먹는다더니, 딱 제 경우가 그렇더군요. 온 식구가 공장에 매달렸던 터라 돈 나올 곳이 전무한 형편이니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외상값을 갚을 길이없었지요. 그렇다고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어린아이들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 염치불구하고 다시외상을 청할 수밖에요.
그나마 푼돈이 생길 때마다 아이들 학교에 가져갈 돈은 못 주더라도 외상값을 조금씩 변제했지요. 면목이 없어 얼굴을 못 마주치는 제게 아주머니는 너무 마음 쓰지말라고, 사정이 좋아지면차차 갚으면 되지 않겠냐며 다독여 주셨어요. 그런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친정어머니처럼살갑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외상값을못 갚은 미안함에 아주머니를 멀찍이서 뵙곤 허겁지겁 몸을 피한 적도 부지기숩니다.
비록 그때보다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도 종종외상거래를 하는 형편이지만 마음만은 넉넉합니다. 제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 주며 큰 사랑을 나눠주시는 이웃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아주머니께 이 기회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아주머니께 빚진 따뜻한 사랑, 저도 누군가에게 꼭갚겠다고 약속드립니다. ![](/upload/post_content_logo[158].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