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허름한 집들이 즐비하던 경기도의 한 도시였다.지금은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개발이 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변했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도 아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곳을 떠난 뒤로 다시 가본 적이 없지만 나는 가끔 그 집에서살았던 기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특히 여름이 되면 장마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집이 지대보다 낮아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부엌에 물이 넘쳐나곤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가 부엌에서 물을 퍼내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고생하던 엄마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렸던 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 집에 살았던 기억 중에 가장 싫었던 건 아버지 심부름을 다니던 일이다. 아버지는 당시 일용직 노동자였다. 일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일이없어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그때 술을 많이 드셨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있는 날이 정말 싫었다. 그런 날은 내게 외상으로 술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꼭 시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을 하시고 돌아오는 날은 술값과 함께내 과자 값까지 손에 쥐어줬지만 쉬는 날이면 돈이 없다보니 외상술을 드셨던것이다.
외상으로 술을 받아오라고 하면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가긴 했지만 가게앞에 쪼그려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외상값도 안 갚으면서 또 외상이냐? 아버지한테 가서 다시는 외상 못 준다고 그래라.”가게아줌마의 쏘아붙이던 말도무서웠지만 같은 반 친구였던 가겟집 아들을 보기가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그런 내 맘을 잘 알고 있던 엄마는 어느새 내 뒤를따라와서 대신 술을 샀고 나는 그 술을 아버지께가져다 드렸다.
내가 외상술 심부름에서 벗어난 건 이사를 하고부터였다. 부모님께서는 작은 슈퍼를 하나 얻어 장사를 하셨는데 여러 가지 물건을 팔았다. 슈퍼 물건 외에도 김밥이며 어묵, 떡볶이 등을 함께팔다보니 엄마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바쁠때는 나도 가게 일을 도와야 했지만 아버지 외상술 심부름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아버지도 슈퍼를 하면서 술을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담배까지 끊어버리더니 그 뒤로는 정말 열심히 사셨다. 그건 모두 엄마 때문이었는데, 새벽부터 밤늦도록 잠시 앉아보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는 도저히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하셨던 것이다.
몇 년 더 슈퍼를 하다가 우리 가족은 바닷가로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작은 배를 하나 마련하셨고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다. 엄마도 아버지랑 함께 바다에 나간다. 바다일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지만 두 분은 늘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이 고되다보니 요즘은 가끔 술을 한잔씩 하시는데 예전의 아버지 모습이 아니어서마음이 아프다. 많이 늙고 다리까지 아파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면 무서운 얼굴로 내게 외상술을 사오라고 시켰던 아버지 생각이 나곤 한다. 그리고 가끔은 아버지의 그 호통소리가 그리워진다. 함께 살지 않아 부모님 일을 도와드릴 수는 없지만 두 분이서 항상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upload/post_content_logo[160].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