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곳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이다. 본래 양반가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까지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들이 즐비해 시간이 멈춘 듯 고아(高雅)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근 골목 구석구석 카페와 갤러리, 인테리어사무소 등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서촌은 약간 한적한 편이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으로 통의동, 창성동, 체부동,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필운동 일대를 일컫는다. 서촌으로 불리다 2011년 종로구에서 세종대왕 탄신 614주년을 맞아 ‘세종마을’로 명명했다. 동서로는 경복궁의 서쪽 담장에서부터 인왕산 산자락 바로 아래까지, 남북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부터 경복궁역과 사직단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포함된 동네가 세종마을이다.
경복궁역 3번 출구, 영추문에서부터 서촌 여행이 시작된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 영추문(迎秋門) 그래서인지 가을에 더 걷기 좋은 길이다.
이상, 윤동주, 김동리 등 당대의 문인들이 거쳐 간 곳. 이제는 새로운 실험적 문화공간으로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북촌의 한옥처럼 멋스럽지는 않아도, 어릴 적 살던 동네처럼, 서촌은 그런 풍경을 전해준다.
그래서 더 정답다.
우리 살던 어릴 적 동네 모습
북촌이 사대부를 비롯한 양반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의관, 음악가, 화가 등 전문직 중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등이 서촌에 살았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서촌 주민이었다. 겸재 정선의 명작 ‘인왕재색도’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 일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인 매동초등학교와 공립 도서관인 종로도서관,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배화여고 생활관 등 역사적 건축물들도 서촌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서촌일대를 걷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예술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다.
서촌여행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로 이어지는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두 개 권역으로 나누어 즐기는 것이 편하다. 자하문로 서쪽에는 인왕산과의 사이에 사직단, 필운대, 이상의 옛집, 통인시장, 윤동주 하숙집 터, 우당기념관, 선희궁 터, 송강 정철 집터 등이 있다. 자하문로 동쪽에는 경복궁 담장과의 사이에 대림미술관, 진아트갤러리, 통의동 백송 터, 보안여관, 쌍홍문 터 등이 위치한다.
여행은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경복궁 영추문이 보인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영추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대림미술관. 대림미술관을 시작으로 영추문까지 진화랑, 브레인팩토리, 쿤스트독, 팩토리, 팔레드서울, 옆집, 류가헌 등의 전시공간이 이어진다. 마음에 드는 전시가 있다면 들어가 관람해도 좋겠다. 길이 넓어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거닐기 좋다. 영추문 가까이쯤에서 투박한 벽돌로 지어진 허름한 건물 한 채를 만난다. 유난히 하얀 간판에 파란 글씨로 ‘보안여관’이라고 씌어져 있다. 보안여관은 8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통의동 역사 그 자체다. 천재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묘사한 막다른 골목이 보안여관 부근이었다. 미당 서정주는 보안여관에서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문인들이 짐을 풀고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였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탓에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고 경호원 가족의 면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허름한 여관은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2006년 문을 닫았는데, 다행히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가 건물을 인수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지금은 실험적인 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보안여관을 지나면 창성동 한옥마을과 만난다. 사대문 안의 한옥 1,400여 채 가운데 300여 채가 서촌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생활형 개량 한옥이다. 회벽 대신 콘크리트로 담을 쌓고 기와와 양철지붕이 맞닿아 있는, 책에서 보던 우리나라 전통 한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왠지 어렸을 적 살던 동네가 생각나는 친숙한 모습이다.
한옥마을에서 쌍흥문터, 해공 신익희 가옥을 지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의 연속이다. 걷다 보면 길을 잃기 일쑤다.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탄 북촌과 달리 서촌 골목은 친절하지 않다. 이정표도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 아니다. 그래도 서촌 골목은 으리으리한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보다 낯이 익다. 1990년대 말 건축 규제 완화로 서촌에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골목만큼은 어릴 적 동네에서 만나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파란 하늘과 초록빛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기와지붕을 타고 낮은 담장을 따라 고양이들이 산책을 다니기도 한다. 담벼락에 놓인 화분은 가을햇살을 흠뻑 빨아들이고 있다. 좁디좁은 골목길이지만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골목 구석구석 이런 소소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가볼 만한 카페들도 많다. 갤러리 카페 ‘고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멋스러운 곳. 커피와 수제 소시지, 달걀 프라이①가 함께 나오는 브런치가 맛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가수 윤건이 운영한다는 카페 ‘마르코의 다락방’, 빈티지 가구 매장인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카페 ‘MK2’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메종기와’는 정통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는 한옥 레스토랑으로 음악가 출신 윤혜정 씨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까델루뽀’는 효자동 레스토랑의 터줏대감. 수백 가지 와인 목록을 보유하고 있어 와인 마니아(mania)들이 많이 찾는다.
서촌의 골목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친절한 이정표도 없지만 어린 시절 놀았던 골목처럼 친숙하고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영추문에서 이어지는 대림미술관, 진화랑, 브레인팩토리 등 크고 작은 미술관과 아트숍이 이어진다.
진화랑의 호박 조각이 가을 햇살에 더 아름답다.
아주 오래된 대오서점. 찾는 이의 발길은 줄어들었지만 서점은 여전히 한자리를 지키며 있다.
(각주)
① 순화어 부침, 튀김
② 무정부주의(anarchism).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 권력·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시장 지나 예쁜 카페가 숨은 골목으로
자하문로를 건너 청운공원을 지나 경복궁 방면으로 내려오면 국립농·맹학교다. 담장을 유심히 보자. 수화를 담은 모형의 타일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모양의 타일이 학교 담장 벽에 붙어있다. 맹학교 맞은편은 우당기념관. 우당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아나키스트운동②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이다. 우당기념관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통인시장으로 내려가는 길도 재미있다. 옥인동, 누상동 주택가가 이어지는데 길가에는 소박한 간판의 책방, 과일가게, 어린이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 등이 늘어서 있다. 가게만큼이나 간판들도 하나같이 소박하다. 크고 화려한 도심 간판과는 딴판이다. 크기도 자그마하고, 글씨도 손으로 직접 쓴게 많다. 통인시장은 서울 도심에 이런 재미있는 시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고 한국전쟁 이후 체부동, 누하동 등으로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커졌다. 통인시장은 점심 무렵 찾아야 재미있다. 입소문을 타고 통인시장 명물이 된 도시락카페 ‘통通’을 경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반찬, 떡, 분식 등 유독 먹을거리 가게가 많은데 시장 골목 한가운데 위치한 고객만족센터에서 통인시장 엽전을 구입한 후, 도시락통을 들고 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엽전을 내고 반찬을 입맛대로 선택해 담으면 된다. 인사를 잘하고 살갑게 대하는 손님들에겐 인심 좋은 상인들이 덤을 후하게 올려준다. 점심값 아끼려는 알뜰족은 물론 데이트 나온 연인들과 장보러 나온 주민들이 어울려 따스한 풍경을 빚어낸다.
통인시장의 명물 기름 떡볶이. 30년간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고소하고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팔고 있는 주인 할머니.
누하동 골목. 공방과 카페들이 하나둘 들어서 산책하며 쉬어가기 좋고, 구경하는 재미도 좋다.
동양백화점. 오래된 이국 소품들이 낯설지 않게 서촌 풍경과 잘 어울려 있다.
통인시장을 나오면 옥인동과 누하동이다. 작은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기대고 서 있다. 조용한 듯 떠들썩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버스가 부릉부릉 골목을 누비고 자전거 벨 소리도 따르릉거린다. 골목 모퉁이에서는 책가방 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활기를 불어넣는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아득한 골목길을 걷다 보니 금세 주위가 조용해진다. 몇 해 전부터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공방과 카페들이 이제 꽤 많이 늘었다. 가방과 엽서, 액자 등 디자인 소품과 서촌 관련 안내서를 얻을 수 있는 ‘옥인상점’, 삼청동에서 누하동으로 자리를 옮긴 빈티지(Vintage)① 숍 ‘동양백화점’, 멋스러운 소품과 찻잔을 파는 앤티크 상점 ‘티쉬운트’와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선술 바 ‘바르셀로나’까지, 서촌 골목마다 숨은 보물 같은 공간들을 찾아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렇게 걷다 보면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과 만난다. 옥인부동산 안쪽 골목에 자리한 대오서점이다.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미닫이문이 정겹다. 영화에나 나올듯한 간판의 글씨체는 또 어떤지. 정성들여 손으로 쓴 듯한 간판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미닫이문을 열고 서점에 들어서면 조선시대 중인이 살았을 법한 아담한 한옥이 나온다. 대청마루, 처마 아래 등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대오서점은 KBS 2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상어’에도 등장했다.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추억을 만들어가는 장소로 나왔다. 가수 이승기의 ‘나에게 초대’ 뮤직비디오에서도 서촌을 산책하던 이승기가 들르는 헌책방으로 나왔다. 한때 인근의 매동초, 청운초, 청운중, 경기상고 학생들로 붐볐지만 지금은 찾는 이가 없다.
서촌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수성동 계곡으로 가볍게 걸어도 좋다.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 중기 유명 화가였던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장동팔경첩-수성동’의 실사판(實寫版)을 볼 수 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경치를 보고 나면 서촌에 예술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각주)
① 연대가 오래된, 오래 되어 값어치 있는, 유서 깊은 물건. 원래는 와인의 생산연도, 포도 수확연도를 일컫는 말이나 와인 이외의 분야에 쓰이게 되면서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는 유행이나 유행제품을 말함.
여행정보
통인시장의 명물 ‘원조 할머니 떡볶이’에서 기름떡볶이를 맛보자. 주인 김임옥 할머니가 30년 넘게 한 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기름에 떡볶이를 볶아낸다. 아침마다 방앗간에서 받아온 쌀떡으로 만들어 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 자리한 ‘누상동 화덕핏자’(070-8285-9344)의 노릇하게 구워 나오는 피자도 주말 서촌산책에 어울리는 메뉴. 자몽에이드를 곁들이면 더욱 좋다.
‘남도분식’(02-723-7775)에서는 전라도 지역에서 유래한 상추튀김을 비롯해 다양한 분식류를 맛볼 수 있다. ‘옥인상점’(02-737-4788)은 <서촌방향>이라는 책을 집필한 설재우가 운영하는 공간. 서촌에 대한 이모저모를 알 수 있다.
‘동양백화점’(02-732-2001)에서는 일본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다양한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밥 플러스’(02-725-1253)에서는 일본가정식을 맛볼 수 있다. 카레덮밥과 크로케 추천. ‘전대감댁’(070-4202-5170)은 각종 ‘전’으로 이름이 높다. 옛날 주막을 연상케 하는 한옥 구조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