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매화, 산수유가 이 땅의 봄을 밝히며 한바탕 요란하게 피고 지고 화창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반팔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날씨다. 곧 여름이 시작될 터. 노루 꼬리처럼 짧기만 한 이 땅의 봄이 안타까워, 지는 꽃에 마음이 안절부절못하여 기어이 강진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땅바닥에 낭자한 동백이라도 볼 요량이었다. 봄 햇살이 잠자리 날개마냥 투명하게 빛나고 차진 개펄에는 키조개와 바지락, 낙지가 쑥쑥 자라는 그런 때였다.
봄의 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떨어진다. 봄이
깊어졌다. 다산의
흔적을 찾아간 전남
강진의 봄은 이미
깊어질 때로 깊어진
뒤였다. 그 봄길에
다산을 만났다.
사람들은
다산초당을
휘휘 돌아보고
다시 내려가지만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코스다. 600m는 오르막길,
200m는
내리막길. 하지만
올라가는 길도
험하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도
30~40분이면
백련사에 닿는다.
다산의 흔적을 찾아서
다산초당부터 찾기로 했다. 강진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가 다산 정약용이다. 경기 남양주 출신인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강진으로 유배를 와 18년을 살았다. 1801~1818년까지,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유배지에서 홀로 남겨진 그를 찾아온 건 ‘외로움’이었다. 물도, 바람도, 기후도 낯선 먼 마을. 서울에서 귀양 온 ‘폐족(廢族)’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다산은 “7년 동안 유배지에 낙척하여 문을 닫아걸고 지내다 보니 노비들조차 나와는 함께 서서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얼마나 외롭고 먹먹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공부에 매달렸고 유배생활 동안 600여 권의 저서를 쏟아낸다. ‘보이는 것은 하늘 빛깔뿐이고, 밤새도록 들리는 것이라고는 벌레 울음소리뿐’인 외로움을 안고 다산은 ‘논어’ ‘맹자’ ‘시경’ ‘목민심서’ 등을 펴냈다. 모두 정약용의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개인에게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지만 이 땅의 학계에는 축복의 시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다산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 수백 권의 저서나 그의 학문이 갖춘 위엄 이전에, 유배라는 고립된 환경과 18년이라는 미지의 시간을 버텨낸 그의 의지에서 먼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부, 독서, 저술활동이 전부였던 다산이 바깥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자 창구는 편지였다. 다산은 틈틈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과 학유, 둘째 형 정약전 그리고 제자들에게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가장 많은 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편지에서 아들들에게 공부하라고 채근한다.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 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작정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문장가가 되는 일은 꺼릴 게 없지 않으냐.”
둘째 형님 정약전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형님, 이번에 공부를 하다 보니 요순시대의 고적(考績)제도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형님, 지난번 말씀하신 형님의 논의는 너무 탁월합니다. 이번엔 참고삼아 제 논의도 조금 덧붙여 봅니다. 읽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형님, 강진의 물소리가 차갑습니다. 그곳도 계절이 바뀌고 있겠지요?”
동백 밟고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은 강진에 처음 유배와 4년 동안은 강진 읍성 동문 밖 주막집 바깥채 사의재((四宜齋)에 머문다. 사의재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이 올바른 이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그는 주막집에서 일하던 표씨 부인과 인연을 맺고 홍림이라는 딸까지 낳게 된다. 그러다 그를 곤궁히 여긴 해남 윤씨 일가가 초당을 지어주어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거처를 옮기며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가는 길은 기분 좋은 숲길이다. 대숲이 울창하다. 숲에서는 맑은 바람소리가 흘러나온다. 대숲을 지나면 다산초당이다. 다산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와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사람들은 다산초당을 휘휘 돌아보고 다시 내려가지만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코스다. 600m는 오르막길, 200m는 내리막길. 하지만 올라가는 길도 험하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도 30~40분이면 백련사에 닿는다. 오솔길의 풍광만으로도 산길을 올라온 값을 하지만, 이 길의 유래를 알면 감흥은 한층 더 깊어진다. 다산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당대의 학승 혜장선사와 교류를 나누었다. 혜장선사가 해남 대흥사의 말사인 백련사에 머물 때 다산은 그에게서 다도를 배우고 심취했다.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을 찾아 담론을 벌이고 차를 마시기 위해 오갔던 길이 바로 이 오솔길이다. 아마도 다산에게는 백련사와 이 오솔길이 있어 강진이 척박한 유배지만은 아니었으리라. 백련사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는 곳.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에 만개한다. 4월 말이 되면 떨어지기 시작해 바닥을 물들인다. 예로부터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번, 땅에 떨어져서 한번,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또 한번. 지금 백련사에는 땅에 핀 동백이 낭자하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봄 드라이브도 즐겨보자. 마량항으로 가는 23번 국도는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해안도로다. 길은 바다를 오른쪽 옆에 두고 심전도 눈금이 요동치듯 오르내린다. 도로변에는 예쁜 바다마을도 여럿 놓여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핸들을 살짝 돌리기만 하면 된다. 23번 국도는, 어떤 때는 눈부시게 푸른 바다를 보여주고 어떤 때는 기름진 햇살이 내려앉는 개펄을 보여준다.
강진은 예로부터 바람이 없기로 유명하다. 지도를 보면 못질을 한 듯 땅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원래 만(灣)은 파도가 잔잔한데, 강진에 유독 파도가 없는 까닭은 천불산과 만덕산 등 강진을 둘러싼 산들이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길도와 소안도, 대모도, 청산도 등 먼 섬이 한번 파도를 걸러주고 고금도와 완도, 신지도, 조약도, 생일도, 금일도 등 작은 섬이 다시 한번 막아준다.
바다는 조용하지만 포구의 풍경은 부산스럽다. 포구 중간에 자리한 여객선 터미널에는 건너편 고금도를 왕복하는 철부선이 들락거린다. 배가 포구에 닿으면 트럭과 장바구니를 머리에 인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협어판장에서는 경매도 볼 수 있다. 어판장 앞 선착장에서는 물고기를 담은 노란 바구니가 연이어 포구로 담겨져 나온다. 노란 바구니는 옮겨지자마자 오와 열을 맞춰 정리되고 경매인들의 손가락 동작 몇 번으로 팔려나간다. 인근 횟집으로 팔려나가는 것도 있고 남해와 마산, 부산, 광주를 비롯해 서울로도 올라간단다.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무위사도 들러볼 만한 곳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무위사 일주문에 들어서 드는 첫 느낌은 단아하다는 것. 서 있는 건물이라야 극락보전과 산신각,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가 전부다. 절 입구에는 그 흔한 ‘산채식당’ 하나 없다. 절을 휘휘 돌아보는데 채 20여 분이 걸리지 않는다.
작은 절이지만 국보와 보물이 빼곡하다.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다. 조선 세종 12년(143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기둥이 전혀 없다. 벽에는 각종 보살과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무위사의 배흘림기둥은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극락보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다. 지상으로 비스듬해 내려앉은 맞배지붕은 간결하다. 노란 색칠을 한 측면 벽은 소박한 멋을 풍긴다. 모든 잡스러운 장식을 제거한 채, 다만 하나의 건물로서만 서 있는 그 모습이 명징(明澄)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을 보며 훗날, 늙어서 이런 모습이었으면, 삶의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이렇게 담백한 풍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봄 한낮 무위사 앞마당에 월출산에서 날아온 새소리가 내려앉고 있다.
강진 여행의 마무리는 영랑생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잘 알려진 시인 영랑 김윤식은 1903년에 출생해 1950년에 타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이다. 47년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시는 모두 87편이다. 영랑생가는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동백나무가 빽빽하다. 문간채 왼쪽으로 세로로 놓인 사랑채는 영랑의 집필실이다. 사랑채 툇마루 앞에는 감나무, 보리수, 송악덩굴, 백일홍 나무가 심어져 있다. 3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도 있다.
툇마루에 앉는다. 아마도 영랑은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시를 썼을 것이다. 마당에 내려앉는, 장독대에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돌담 아래에 고여 있는 햇빛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돌담을 따라 이리저리 거닌다. 발끝에, 돌담에, 가슴 한켠에 햇볕이 어룽 댄다. 봄 햇빛은 맑고 투명하고 눈부시다.
봄, 봄, 봄. 강진은 온통 봄이다.
각주 ① 뚜렷하지 아니하고 흐리게 어른거리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① 같이 /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샅이 /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각주 ① 사방으로 뻗친 햇살
강진여행 팁
★ 서해안고속도로 또는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는 목포IC로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영암을 지나면 강진에 닿는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면 광산IC로 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와 영암을 지나면 강진이다.
★ 강진은 맛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강진의 대표 음식은 한정식.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나오는 수준을 넘어 접시가 2층, 3층으로 쌓인다. 민어찜, 조기탕, 바지락탕, 전어무침, 해삼, 개불, 광어, 게, 굴, 새우, 전복, 가오리찜, 홍어, 토하젓 등이 상에 오른다. 명동식당(061-434-2147), 시민운동장 앞에 있는 청자골종가집(061-433-1100) 등이 유명하다. 대중적인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병영면에 있는 설성식당(061-433-1282)으로 가볼 만하다. 돼지불고기백반으로 널리 알려진 집이다. 돼지불고기를 비롯해 낙지 데침, 각종 나물, 젓갈 등이 나온다. 4명이 못 되더라도 4인상을 받아야 하고 값을 다 내야 한다. 2만원. 마량포구에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다. 서울보다 양도 푸짐하고 싱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