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네 동네, 영광 법성포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왔다면 굴비 굽는 냄새는 해질녘까지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군불을 때고 남은 숯불 위, 석쇠 사이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던 굴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두어 마리 되는 굴비구이를 상 한가운데 올리면 그 어떤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하고 부드러운 굴비 살이 입안에 들어온 순간, 밥 한 그릇이 뚝딱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먹을 것이 풍족해진 요즘, 굴비는 흔한 먹거리가 됐다.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세상이니 굴비 한 마리 상에 올라왔다고 반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굴비의 고장인 전남 영광에 들어서면 어떤 기대감이 턱까지 차오른다.
영광IC를 지나 법성면, 가마미해수욕장 방면으로 20여 분을 달리면 법성포에 당도한다. 법성포 앞에는 영광의 너른 칠산 바다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산도부터 칠산도까지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에 속하는 7개의 섬이 자리한 바다를 통칭해 칠산 바다라 부른다. ‘배가 지나갈 때 배 위로 뛰어오르는 조기만으로 만선을 이루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한 때 칠산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 어획량이 상당했다. 특히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 음력 3월 11일), 그것도 밀물이 가장 높은 사리 무렵에는 알이 차고 맛 좋은 산란 직전의 조기를 잡을 수 있었다. 조기는 양력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에 칠산 바다를 거쳐 4월 하순에서 5월 중순 연평도에 닿아 알을 낳는다. 조기의 이동 경로가 그러하니 곡우사리 때 칠산 바다에서 잡은 조기는 알을 품어 영양이 가득하다. 산란 직전의 조기는 기름기가 많은 반면, 이 시기의 조기는 통통히 살이 올라 더 부드럽고 담백하다. 하여, 법성포에서는 곡우사리 때 잡은 조기를 가장 으뜸으로 쳤다.
조선시대의 영광 지역은 바다와 육지가 길러낸 풍부한 산물 덕에 부자 고을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중 법성포는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뱃길의 요충지이기도 해서 전라도 15개 고을에서 징수한 세곡을 관리하던 법성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기 파시가 열려 사람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육상 운송이 발달하면서 배를 이용한 운송이 쇠퇴하고 토사 유입 등의 이유로 포구의 수심이 얕아지면서 배의 유입이 원활하지 않자 법성포의 모습도 점점 변화했다. 현재는 칠산 바다, 제주도, 추자도 등 청정해역에서 잡은 조기에 법성포 굴비장인들이 세월로 터득한 염장 비법을 더해 법성포굴비를 완성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영광군 기사에 의하면 “석수어(조기의 딴 이름)는 군 서쪽의 파시평(波市坪, 지금의 법성포 일대)에서 난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때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모여 그물로 잡는다.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국용으로 쓴다.”라고 쓰여 있을 만큼 법성포의 오래된 대표 특산물이다. 곡우사리 때 잡은 조기를 가장 으뜸으로 쳤다.
영양분을 지키는 특별한 염장 비법
법성포의 주요 도로에는 ‘굴비로’와 같이 ‘굴비’라는 두 글자가 착 달라붙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굴비골목 사이사이 500여 개에 달하는 굴비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가게 앞 공터, 처마마다 크기 따라 10마리, 20마리씩 보기 좋게 엮어놓은 굴비 두름이 가지런히 걸려 있을 만큼 곳곳이 굴비 천지다. 눈 돌리는 곳마다 굴비들이 해바라기 하고 있는데도 비린내가 진동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 법성포 특유의 굴비 염장 비법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법성포에서는 1년 넘게 보관해 간수가 빠진 영광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재 염장한다. 이를 ‘섭간’이라 하는데 조기의 크기, 수확 시기에 따라 조기가 함유한 성분이 다르기에 그 특성을 파악한 후 염장 시간을 정한다. 법성포굴비 염장의 숨은 비법이다. 소금물로 간하는 물간 대신 이렇게 섭간을 하면 알배기 조기의 영양분이 몸속에 그대로 스며든다. 염장한 조기는 엮어 깨끗한 물로 4~6회 정도 씻어 건조한다. 얼리고 녹이고 염장하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살이 탄탄하고 쫄깃한 법성포굴비가 탄생하는 것이다.
옛날엔 냉장 시설이 없어 3~4일간 섭간한 조기를 북어처럼 바짝 말려 보관했다. 통보리 속에 넣어 보관한 것을 보리굴비라 하는데 보리의 겉껍질이 굴비의 기름을 잡아 그 맛이 더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굴비는 영양 덩어리다. 조기로 먹을 때보다 단백질, 칼슘, 인, 철분, 무기질 등의 함량이 높다. 봄 평균기온이 약 11도인 법성포는 북서풍이 불고 일조량이 풍부해 굴비 말리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법성포굴비가 으뜸인 또 하나의 이유다.
굴비골목 따라 걸음을 옮기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걸려 있는 굴비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새색시처럼 새초롬하게 입을 다문 것,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린 것, 졸음이 쏟아지는 지 반쯤 눈을 감은 것 등 굴비의 다양한 표정이 우리네 인생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니 스르륵 배가 고파왔다. 굴비를 눈앞에 두고 맛보지 않는 것은 법성포굴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울타리 식당의 굴비정식. 직접 섭간한 굴비구이와 손수 담근 간장게장, 신선한 재료로 만든 밑반찬이 잘 어우러져 집 밥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법성포의 바람, 햇빛, 한울타리 식당을 운영하는 부부의 정성이 그대로 담겨진 밥상이다.
구워야 제맛, 먹어야 보배
굴비정식으로 유명한 ‘한울타리 식당’을 찾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식당 안에는 늦은 점심을 먹는 손님들이 제법 보였다. 김태봉·김경희 씨 부부가 운영하는 이 식당은 문을 연 지 올해로 5년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맛 좋기로 소문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최상의 조기를 구입하고 섭간한다는 남편 김태봉 씨와 친정엄마에게 물려받은 음식 솜씨로 반찬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드는 아내 김경희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굴비장사를 시작했다는 김태봉 사장은 40여 년을 굴비와 함께했다. 좋은 조기를 고르는 눈, 조기를 더 맛있게 섭간하는 방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그의 손끝에서 한울타리 식당의 굴비정식이 완성된다. 노릇하게 구워낸 굴비가 상의 중심에 놓인다. 보드랍고 고소하며 삼삼한 굴비 맛이 입안 가득 맴돈다. 간장게장, 부세구이, 매실장아찌, 참나물, 버섯볶음, 죽순나물, 생굴, 조기젓, 실치 볶음 등 20여 가지 반찬이 굴비구이를 감싼다.
빨간 조기매운탕은 칼칼하면서도 시원하고, 가장 맛있다는 봄 꽃게를 구입해 김태봉 사장이 직접 만든 간장게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다. 밥 없이 그냥 먹기엔 좀 짜다 싶은 일반 간장게장과 달리 손으로 잡고 게살을 흡입해도 짜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데다 특유의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굴비간장게장정식으로 이름을 바꿔도 무방할 만큼 매력적이다. 부부는 ‘남의 손으로 만든 음식이 간이 맞겠느냐’며 직접 양념하는 것을 고수한다. 남편은 좋은 재료를 사서 굴비와 간장게장을 직접 만들고, 아내는 광주 풍암시장까지 가서 싸고 신선한 재료를 사와 밑반찬을 만든다니 이 집 굴비정식의 레시피는 법성포 바람, 햇빛, 영광 천일염, 부부의 정성 어린 손맛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한 상 거하게 먹고 나오는 길, 오랜만에 참으로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은 기분이다.
법성포 굴비 맛집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방면으로 약 3시간 30분가량 달린다. 영광IC 진입 후, 영광IC 삼거리에서 영광로 법성 방면으로 직진하면 해안도로가 나타난다. 이 길 따라 가마미해수욕장·법성포 방면으로 1km 정도 달리면 법성포 굴비골목이다.
+ 한울타리 식당 / 굴비정식 못지않은 봄철 잡은 게로 담근 간장게장이 일품이다. / 영광군 법성면 굴비로 7 / 061-356-2590
+ 일번지식당 / 굴비정식을 주문하면 병어찜, 홍어무침, 갈치튀김 등 맛깔스러운 젓갈 밑반찬이 푸짐하게 나온다. / 영광군 법성면 굴비로 37 / 061-356-2268
+ 동원식당 / 곁들여 나오는 굴비무침, 굴비전골도 맛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굴비정식을 맛볼 수 있다. / 영광군 법성면 굴비로 103 / 061-356-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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