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이기성
쥴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는 2011년 맨부커상① 수상작이다. 쥴리언 반스는 이미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플로베르의 앵무새>같은 작품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으니 말이다. 쥴리언 반스의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억과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마치 크로스토퍼 놀란 감독의 데뷔작 <메멘토>처럼 그가 말하는 기억은 왜곡과 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추상적 재구성을 선택한다. 기억의 구조가 이기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이 기억의 이기성 위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평범한 문제아였던 고교시절에서 출발해 65세가 넘은 현재까지의 삶을 보여준다. 평범한 문제아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그의 삶에는 특별한 질곡이나 그늘이 없다. 물론 학창 시절 누군가 학교 동급생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첫사랑에게는 모멸의 추억을 선사 받기도 한다. 꽤나 친하게 지냈던, 아니 영향을 받았던 친구가 대학교에 가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좀 특이한 기억이라고 할까? 왜냐하면 그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데미안처럼 그의 인생에 어떤 지침을 남겨준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 평범했다면, 데미안과 같았던 에이드리언의 삶은 비범했다. 학창시절 그를 비롯한 평범한 친구들은 에이드리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고, 그의 인증을 받고 싶어 했으며, 그의 환심을 하려 했다. 그는 삶이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으로 운용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이 곧 삶의 잔상이라고 말이다. 에이드리언은 비범한 학생답게 케임브리지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반면, 토니는 평범하게 여자친구를 사귀고, 어느 날부터 에이드리언을 잊는다. 베로니카가 그의 삶의 대부분이 되고,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하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친구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기도 하고, 그녀의 집에 찾아가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첫 관계 이후 그녀와 헤어진다. 사실, 여기까지도 그렇게 특별한 사건은 없다. 다만,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을 만나게 되고, 그는 그 사실이 좀 불쾌하다. 그래서 그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가 기억하기엔, 평범한 내용의 별것 아닌 편지였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에이드리언이 아파트에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손목을 긋고 욕조에 앉아 죽는다. 그는 에이드리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재빠르게 잊는다. 토니는 두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그렇게 65세까지 늙는다. 1부의 내용은 이렇듯 그가 기록하는 자기 삶에 대한 기억이다.
1부는 이렇게 끝맺음 된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살아남은
자의 변명
하지만 2부가 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나”의 입장에서 기록했던 이야기들과 달리 토니는 그렇게 평범하지도 그렇다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그가 썼던 삶의 기록들은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 이뤄진 어떤 기억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유리한 사실들만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떤 점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네거티브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은 15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첫사랑 그녀, 서연은 자신에게 모멸과 수치를 안겨 준 여성이다. 좋아한다고 여겼고, 꽤나 마음을 다했지만 당시 그녀는 자신보다 더 나은 선배에게 마음을 주었다. 훗날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 당시 그녀는 초라한 자신에게 모멸감을 남겨준 채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는 선배에게 간 여자였다. 그런데, <건축학개론>은 어떤 점에서 남성 판타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모멸감을 주었던 여자가 15년 만에 나타나서 씻김굿처럼 모멸의 기억을 다 지워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넌지시 묻기도 한다. 결국 남자는 그녀를 두고 과거가 없는, 그래서 아픔이나 모멸에 대한 기억도 없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과거의 그녀에게는 들을 대답만 있었을 뿐이지 애초부터 함께 할 미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는 이 재회가 아프고 더 치욕적이다. 토니는베로니카를 다시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못된 인간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의 기억이 편집해뒀던 것과 달리 토니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악담과 저주가 가득한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예언처럼 힘을 발휘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언은 토니 때문에 죽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니는 살아남았기에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란 살아남은 자의 변명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사랑과 우정의 기록마저도 그렇다.
토니는 역사를 승자들의 거짓말이라 여겼지만 65세에 이르러 “살아나은 자의 회고”에 가깝다고 적는다. 토니는 자신이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보냈던 편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아름답고 윤리적인 문장으로 채워졌던 글들로 기억한다. 왜곡된 기억들은 곧잘 시간과 담합한다. 그는 친구의 행운을 빈 멋진 녀석으로 자신을 기억하지만 사실 비열한데다 치졸하기까지 하다. 기억에 대한 아이러니, 누구나 가진 삶의 비밀을 다루는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어느 편에서 나의 삶을 기억하고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를 묻는 문제적인 작품이다. 아마, 누구나 한번쯤 이렇게 비겁한 가해자가 되었던 기억이 한번쯤은 잊지 않을까? 그러니까 소설 속 토니는 특별한 범죄자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중 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산책방 / 쥴리언 반스 저 , 최세희 역
각주
① 맨부커상 -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해마다 영국,
아일랜드 같은 영국 연방국가 내에서 영어로 쓴 영미 소설 중에서 수상작을 선정하는,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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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30여 년간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크 샌델 교수가 시장의 도덕적 한계와 시장지상주의의 맹점을 파헤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을 펴냈다. 시장가치가 교육·환경·가족·건강·정치 등 예전에는 속하지 않았던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확대된 현대사회는 돈만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장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은 ‘과연 시장은 언제나 옳은가?’라는 이 시대의 가장 큰 윤리적 물음을 이 책을 통해 던지며 가치의 변질을 이야기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한 치밀한 논증으로, 돈으로 사고팔 때 원래의 가치와 목적이 훼손되는 재화의 경우에는 시장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장에서 거래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려면 건강·환경·교육·국가안보·출산·인권 등의 재화나 사회적 관행이 지닌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시장의 도덕적 한계와 재화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는 방법을 결정할 철학적 프레임을 제공함과 동시에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중요한 물음을 담고 있는 책이다.
와이즈베리 / 마이크 샌델. 안기순 옮김
musical
창작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가슴 따뜻해지는 뮤지컬 한 편을 추천한다. 시골집 밥상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맛이 가득한 창작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다. 2011년 대구뮤지컬페스티벌에서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식구를 찾아서>는 흥행과는 동떨어진 공연 소재인 노인과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따뜻하고 재미있게 버무렸다. 몽이, 냥이, 꼬와 함께 살고 있는 박복녀 할머니 집에 어느 날갑자기 찾아온 지화자 할머니. 지화자 할머니는 편지봉투 하나를 들이 밀며, 박복녀 할머니 집이 자신의 아들 집이라 우기고 결국 두 사람은 실랑이 끝에 지화자 할머니의 아들을 찾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서는데…. <식구를 찾아서>는 두 할머니와 세 마리의 동물을 통해 세상에 버려지는 것, 홀로 남는 것에 대한 아픔과 치유를 이야기하며 소외와 고독의 그늘이 깊어져가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만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혈연을 넘어 한솥밥을 나눠 먹는 사이라면 반려 동물까지도 ‘식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식구를 찾아서>는 외로움을 치유하는 작품. 전혀 다른 성격의 두 할머니와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 몽이, 고양이 냥이, 알을 낳은 수 없는 닭 꼬 등 세상에서 소외된 이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아가며 위로하고 껴안는 모습은 눈물과 웃음을 짓게 한다.
충무아트홀 소극장블루. ~6월 24일까지
festival
무주반딧불 축제(축전)①
청정지역 무주가 사랑의 빛으로 반짝인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무주반딧불 축제’가 ‘반딧불 빛으로 하나 되는 세상’이란 주제로 사람들의 발길을 무주로 이끌고 있다. 1997년 시작된 무주반딧불 축제는 천연기념물 제322호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열리는 환경 축제로 99년 문화관광 축제로 지정된 이래 제15회 축제까지 정부지정 우수 축제 및 미국 CNN 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선(남대천 섶다리)으로 선정되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는 축제이기도 하다. 반딧불이의 발광과 생태관찰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디별 천문과학관, 형설지공 등의 다양한 체험과 섶다리, 방앗거리, 낙화놀이 등 지역문화의 시연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더불어 무주의 젖줄인 남대천 수변공간에서는 송어잡기, 뗏목, 반디유등 등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 공간 또한 마련돼 있다. 환경지표곤충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는 무주반딧불 축제는 물 맑고 공기 좋은 무주의 자연 속에서 초여름 밤의 추억을 만드는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기간 : 6월 8일~6월 16일 www.firefly.or.kr
각주 ① 축전 - 축제의 순화용어
exhibition
터키문명전 : 이스탄불의 황제들
2008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시작으로 2009년 ‘파라오와 미라’에 이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문명전 ‘터키문명전 : 이스탄불의 황제들’이 전시 중이다. 동서 문명이 교차하면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터키의 문화유산을 조망할 수 있는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전시로 터키 문명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다. 기원전 3,000년 경 터키 아나톨리아 고대 문명 시기에 제작되었던 유물에서부터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터키 역사 전반을 아우를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터키 앙카라 소재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미술관, 톱카프궁박물관 등 총 4개의 터키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 152건 187점을 엄선했다. 그 자체로 거대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이스탄불 톱카프궁박물관의 술탄 쉴레이만 1세의 칼, 보석 장식 커피 잔 받침 등 오스만 제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 술탄이 사용했던 다양한 소장품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총 4부로 구성된 전시는 터키의 고대 문명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세계문명사에서 중요한 터키의 역사 전체를 다루며 터키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 ~9월 2일까지.
www.istanbul2012.co.kr
classic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시리즈Ⅴ
페레티 & 로방 듀오 콘서트
2008년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해마다 열렸던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가 올해로 다섯번째를 맞았다. 대강당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을 통해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가 하면, 공연 직전 짧은 강의를 통해 파이프오르간 음악을 관객에게 널리 알려왔기에 공연 소식이 더 반갑다. 오는 6월 23일, 단 하루만 공연하는 이번 무대는 유명 오르가니스트인 이탈리아 출신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피에르 다미아노 페레티와 프랑스 출신 장-밥티스트 로방의 듀오 콘서트로 마련했다. 페레티는 1999년 영국 세인트올번스 오르간콩쿠르 1위 수상자로 현재 빈음대 교수이며, 로방은 현재 베르사유궁전의 오르가니스트다.
이번 듀오무대는 ‘파이프오르간과 떠나는 유럽여행’이란 제목으로 비발디, 모차르트, 드뷔시, 바르토크, 라벨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사한다. 두 사람은 한 대의 오르간을 둘이 연주하는 연탄곡으로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서곡과 라벨의 발레모음곡 ‘어미거위’를 선보일 예정이다. 쉽게 접할 수 없는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6월 23일. www.sejongp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