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경제학이 ‘시장 균형’이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원하지 않는 상품에 대해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광고, 필요보다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게 하는 신용카드 등 다양한 종류의 조작과 기만으로 이뤄진 피싱 균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Phishing Equilibrium
‘마○○’이 500원 싸게 파는 이유
경향신문사 1층 커피전문점 ‘마○○’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2500원에 판다. 여전히 “탕비실에서 공짜 믹스커피를 마시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출근 전·식사 후·업무 중 아메리카노를 찾는 이들 덕분에 좁은 매장은 항상 붐빈다. 한 잔 가격이 1000원으로 내린다면 탕비실을 포기하고 마○○으로 향하는 이들이 더 늘어날 테다. 반대로 한 잔에 3000원이라면? 혹은 5000원이라면? 커피도 커피지만, 매장 직원들을 보러 간다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봐서 가격이 배로 뛰어도 여전히 마○○을 이용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은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인건비, 가게 월세 등을 고려해 마○○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리는 비용이 900원쯤 한다고 가정해보자. 지금처럼 한 잔에 2500원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내는 법이 있다. 가격이 1000원일 때만 구입하겠다는 사람에겐 1000원을, 2000원을 내겠다는사람에겐 2000원을 받는다. 3000~5000원에도 마시겠다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가격을 받으면 된다. 마○○ 아메리카노에 대한 선호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든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소비자의 선호에 따라 가격을 달리해 판매하는 전략을 경제학에서는 ‘가격차별’이라고 한다.
모든 소비자를 지불 용의 가격별로 나눈 뒤 가격을 다르게 책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불완전한 수준의 가격차별은 실제로 많이 접한다. 최신 가전제품은 일부 부품만 바뀌어 싸게 팔리고, 자동차는 옵션별로 가격이 달리 매겨진다. 수능 시험표를 가지고 온 고3에게는 가격을 깎아주고, 영화관에선 아침 첫 상영영화에 조조할인을 해준다. 마○○도 경향신문 사원증을 제시하면 500원을 할인해 준다.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차별의 예다.
상품·서비스의 가격 결정 방식이 복잡할수록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낚이는 ‘피싱(Phishing)’에 의한 가격차별이 잦다. 예컨대 통신단말기 시장이 그렇다. 이동통신사들이 매장에 보조금과 판매장려금 등을 주면 매장들은 이를 재원으로 소비자에게 단말기 지원금을 제공한다. 지원금을 똑같이 주는 것은 아니다. 관련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서 단말기를 사는 데 큰 비용을 들이려 하지 않는 소비자에게는 지원금을 많이 주고, 그렇지 않은 소비자에게는 지원금을 덜 풀어서 비싸게 판매한다. 이통사 간에 번호 이동을 하면 더 많은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비싸게 산 사람이 싸게 산 사람을 지원해주는 꼴이다.
한 이통사를 오래 이용한 소비자는 ‘호갱’이 되고, 지원금을 많이 받기 위해 이통사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소비자는 ‘고객’이 된다.
시장 경제의 ‘낚싯바늘’
정통 경제학은 합리적인 소비자와 공급자의 수요·공급 곡선이 만나는 곳에서 시장이 ‘균형(Market Equilibrium)’을 이룬다고 말하지만, 사실 시장은 이렇게 서로를 탐색하고 속이고 속여서 ‘균형’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2001년 수상)와 로버트 쉴러(2013년 수상)는 공저 ‘피싱의 경제학(Phishing for Phools)’에서 이를 ‘피싱 균형(Phishing Equilibrium)’이라고 칭했다. 전통 경제학이 ‘시장 균형’이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원하지 않는 상품에 대해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광고, 필요보다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게 하는 신용카드 등 다양한 종류의 조작과 기만으로 이뤄진 피싱 균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본래 단통법이 제정된 것도 ‘이동통신시장의 보이지 않는 낚싯바늘’에 낚이지 않기 위함이다. “동일 단말기 구입자 간에도 어느 시기에, 어디에서 구입하느냐에 따라 보조금(지원금)이 천차만별로 달라 이용자간 차별이 심화되고 있으며, 단말기 가격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과도하고 불투명한 보조금 지급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투명하고 합리적인 단말기 유통구조(‘단통법 제정안’ 중에서)”를 만들겠다는 게 당초 법안의 취지였다.
단말기 지원금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기만적인 가격차별을 막기 위해 단통법 3조는 ‘①번호이동, 신규가입, 기기변경 등 가입유형 ②이동통신서비스 요금제 ③이용자의 거주지역, 나이 또는 신체적 조건 등의 사유로 부당하게 차별적인 지원금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신규 단말기 구매 시 지원금 한도(출시 15개월이 지난 단말기는 제외)는 고시로 정한다. 지원금 상한액은 2014년 10월엔 30만 원, 2015년 4월부터는 33만 원이다.
Phishing for phools
단통법으로 이통사들의 지원금 경쟁을 줄이면 이통사들이 그 재원으로 통신요금을 낮추고, 서비스를 개선할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원금 상한은 33만 원이지만 실제 이통 3사가 책정한 지원금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10~20만 원 선이다. 경쟁이 제한되자 이통사들이 지원금을 대동소이하게 설계한 것이다.
레몬과 아반떼
정보가 충분하지 않거나 복잡한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자와 이를 악용하는 판매자의 문제를 경제학의 틀에서 최초로 분석한 사람은 ‘피싱 균형’이란 말을 소개한 애커로프다. 이전에는 노벨상 수상자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자넷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의장의 남편으로 더 알려져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수장의 배우자가 주류 경제학의 합리성 가설에 의문을 품는 행동·정보경제학의 대표 학자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애커로프는 1970년 ‘레몬시장 이론(The Market for Lemons)’을 발표했다. ‘레몬’은 우리말의 ‘빛 좋은 개살구’처럼 은유적인 표현이다. 겉은 예쁘지만 속은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는 상품을 뜻한다. 그는 ‘중고차 시장에는 레몬 같은 자동차만 나오지, 결코 좋은 차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주행거리가 5만㎞인 아반떼HD(2008년식)가 중고차 매장에서 300만 원에 팔린다고 가정해보자. 내 자동차 사양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라면 그 시세에 내 차를 팔지 않을 것이다.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았고 사고 한 번 난 적 없다. 최근에는 브레이크 패드도 갈았다. 타조 깃털로 차내 먼지를 털어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차 안에서 담배 한번 피우지 않았고 매주 진공청소기로 청소한다. 이 정도 ‘퀄리티’ 라면 차라리 가족이나 친지에게 파는 게 나을 수 있다. 반면 침수도 당하고, 사고도 몇 번 있었던 아반떼HD 차주라면 시세대로 파는 게 오히려 낫다. 결국 중고차 시장에 나오는 건 ‘레몬’ 아반떼HD뿐이다.중고차를 사고팔 때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보유한 정보가 다르다 보니 이에 따라 경제 주체들의 행동도 달라진다. 정보 비대칭 문제를 분석한 이 논문으로 애커로프는 31년 뒤 노벨상을 탔다. 이 논문 발표 뒤 미국에서는 중고차에 대한 정보 공개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중고차 시장이 활발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고차를 사고팔기 전에 정비소에서 점검 받는 일, 믿을 만한 회사가 중고차에 대한 보증을 서고 중개업무를 맡는 일 등은 이런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직원을 뽑을 때 인턴 사원을 먼저 뽑은 뒤 일을 시켜보고 그중 몇몇을 정사원으로 발령 내기도 하는데 애커로프식으로 말하면 지원자에 대한 정보를 다 갖지 못한 기업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주유소별로 천차만별인 휘발유 가격을 석유공사 홈페이지 ‘오피넷’에 공시토록 하고, 불량 휘발유를 판매하는 사업자를 공개토록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단통법도 마찬가지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정보 격차에서 오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 관련 정보를 공개토록 했다. 단통법 4조는 ‘단말기별 출고가, 지원금액, 출고가에서 지원금액을 차감한 판매가 등 지원금 지급 내용 및 지급 요건에 대해 이용자가 알기 쉬운 방식으로 공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정보 공시를 폭넓게 해서 소비자의 정보 취득 비용을 낮추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공개된 단말기 지원금 정보를 복잡한 ‘난수표’라고 생각한다. 통신 요금 체계가 워낙 복잡하다 보니 공시를 해도 이해하지 못 하는 일이 생긴다.
단통법으로 이통사들의 지원금 경쟁을 줄이면 이통사들이 그 재원으로 통신요금을 낮추고, 서비스를 개선할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원금 상한은 33만 원이지만 실제 이통 3사가 책정한 지원금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10~20만 원 선이다. 경쟁이 제한되자 이통사들이 지원금을 대동소이하게 설계한 것이다. 보조금이 하향 고정되면서 소비자의 기기 값 부담은 늘었고 이통 3사의 영업이익률은 높아졌다. 단통법이 이통사들의 배만 불리고 국민은 모두 호갱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피싱균형의 이동
현행 단통법은 올해 9월 30일까지만 효력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단통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일몰을 연장할 계획이다. 대선 공약대로라면 지원금 상한제를 없애고 보조금 분리공시제를 도입할 것이다. 보조금 분리공시제란 제조업체와 통신사가 지원하는 보조금을 지금처럼 뭉뚱그려 공시하는 게 아니라 각각 공시토록 하는 방안이다. 제조업체가 단말기를 고가로 출시하고 판매할 때는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행위를 막겠다는 취지다. 이 조항이 만들어지면 단말기 출고가 자체가 낮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일각에서는 제조업체의 단말기 보조금은 영업비밀이고 이를 정부가 제한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 정부는 전체 통신요금을 낮추는 공약도 냈다. 공공재인 통신망을 정부로부터 불하받는 이통사를 상대로 한 가격통제는 정부 개입의 근거가 된다는 명분도 있다. 차라리 단통법을 폐지하고 통신요금 인가제를 없애자는 주장도 있다. 시장 점유율 1위인 이통사가 요금을 정해 정부의 인가를 받으면 나머지 이통사들이 그대로 따라가는 현행 요금 인가제를 폐지하고 이통사간 통신요금 경쟁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다.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는 “자유시장은 ‘바보를 노린 피싱(phishing for phools, 정보바보·심리바보란 뜻에서 ‘fool’이 아닌 ‘phool’이다)’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마따나 시장 균형이 사실상 ‘피싱 균형’이라면, 정부의 일은 조작과 기만의 균형 상황을 소비자에게 좀 더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통사로 하여금 데이터 요금제의 가격을 낮추도록 하고 요금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고 복잡한 요금 체계를 단순화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펴는 일,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 지역을 늘리는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새 정부가 국민호갱법이 된 단통법을 어떻게 바꿀지, 이통시장의 피싱균형점을 어떻게 옮겨놓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작가소개 이재덕 기자
경향신문 기자.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 한국은행, 시중은행, 카드사 등에 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