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길
(좌) 하늘전망대.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뻥 뚫리는 곳이다.
(우) 억새가 반기는 둘레길, 발길 닿는 곳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그동안 정상을 향해 숨 가쁘게 오르고 또 오르는 데만 익숙하던 등산문화가 최근에는 옆으로, 수평을 지향하며 ‘함께’, ‘도란도란’,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소통의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다. 변산 마실길, 고창 질마재길,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익산 백제의 숨결 둘레길, 여강길, 무등산 옛길, 마곡사 솔바람길, 서울성곽길, 죽령 옛길 등 걷기가 국민적인 관심이자 대세가 되었다.
사람은 원래부터 모든 곳을 걸어서 갔고, 모든 관계를 걸어가서 맺고 유지했다. 소 팔러 장에 갈 때, 가마 타고 시집갈 때나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옛날은 말할 것도 없고, 근래까지도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우리 환경이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걷는 자는 뛰는 자에게, 또 차로 달리는 자에게 뒤처지는 시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걷지 않고 더 빨리 이동하는 스피드 위주의 이동문화가 우리를 지배해 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걸으려는 생각을 잊은 채 살던 이들이 고향을 찾듯이, 추억을 더듬듯이 걷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물론 건강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느림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도 돌아보는 여유도 부리고 싶었을 게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발길을 옮겨 가는 걷기는 ‘나를 비움’이자 ‘너에게 길손이 되는 근사한 여행’이 되어 우리를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깝게 돌려놓고 있다.
탕춘대성 암문. 퇴락한 성벽을 따라 호젓한 등산로가 나 있다.
아이를 데리고 둘레길을 찾은 가족. 뒷모습마저 아름답다.
여든을 넘긴 노모에게 건너편 북한산 보현봉 일대에 대해서 설명하는 쉰을 넘긴 딸
13개 구간의 총 44km, 탈출과 접근 쉬워
북한산 둘레길은 모두 70km쯤 되는 코스로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을 에두른 명품산길이다. 의정부시 안골에서 시작해 다락원 캠프장, 우이동, 정릉, 보토현을 거쳐 송추를 도는 환상(環狀) 둘레길 코스다. 대부분 절과 약수터, 공원지킴터를 거치며 울창한 숲길과 아담한 오솔길로 이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산길이다. 높은 봉우리와 능선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현재 탐방예약제로 입장할 수 있는 우이령길(6.8km)을 포함해 우이동 소나무숲길을 출발하여 수유리 순례길~흰구름길, 정릉 솔샘길~명상길, 구기동 평창마을길~옛성길~구름정원길, 산성지구 마실길~내시묘역길, 송추 효자마을길~충의길로 연결되며 북한산을 한 바퀴 돈다.
마을과 마을을 이은 제주 올레길과는 달리 북한산 둘레길은 산이 주제다. 가끔 도심과 도로, 농원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나지막한 산길이 주를 이루고 그 사이에 산성과 절, 유적지를 두루두루 에두르며 구절양장으로 뻗어간다.
44km의 북한산 둘레길 중에서 탕춘대성을 지나는 7구간 옛성길과 환상적인 스카이워크를 따라 걷는 8구간 하늘정원길, 80년대 풍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은 여기소마을과 북한산성을 지나는 10구간 내시묘역길,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13구간 우이령길은 그 중 돋보인다.
북한산 둘레길의 최대 장점은 접근성이 빼어나고 탈출은 더 쉽다는 것이다. 대부분 30분 거리 안에 탈출로와 접근로를 만나고 그것도 손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훌쩍’ 떠날 수 있는 게 북한산 둘레길이다. 또 지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정표와 구간 상세도가 잘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길 잃을 염려가 없다. 13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짬나는 대로 끊어가기도 좋다. 여유로울 때는 몇 구간을 이어 가고 중간에 갑자기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곳에서 내려서면 된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어머니와 딸이, 아버지와 그의 늙은 아버지가 손 잡아주고 물을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함께 걷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선생과 제자가, 멀리 떨어져 지내던 친구가, 부부와 아이들이, 그리고 험하고 멀던 북한산과 북적이던 서울 도심이 소통하는 아름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