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갤러리 르느와르
1900년 레지옹 드뇌르 훈장을 받는 등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화가의 칭호를 받았던 르느와르. 그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고 말고 즐거운 일이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는 작품으로 인상주의 회화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남아 있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이런 영원한 아름다움의 희열을 남긴 르느와르이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 20여년은 고통과 비애로 점철되어 있다. 말년의 심한 류머티즘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하였다. 그렇지만 종종 그는 엄지손가락과 두 번째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쥐고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그의 화폭을 채워 나아갔다. 구슬땀을 흘리며….
그의 전신에 이르는 고통은 서서 일을 할 수도 없게 하였으므로, 팔레트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의자로만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완치될 수 없는 고통 속에 작업에 몰두하는 스승을 바라보며 제자 '마티쎄'는 '선생님, 왜 그림을 그리시나요? 왜 고통을 자청하시나요?'라고 울부짖듯 물었다. 르느와르는 그의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답했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르느와르는 1841년 양질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가난한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평생 화가의 길을 걷게한 계기는 가난으로 학업을 접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 다니면서 부터이다. 낮에는 훈련소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무료로 여는 드로잉 수업에 임하였다. 그의 남다른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게 된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으로 20세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된다.
이 무렵 부유한 화가 지망생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모네와 시슬레 등과 교우하면서 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데 몰두하였는데, 이 일이 훗날 외광파가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난은 끝없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자연 관찰의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꿈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시기였다.
〈부채를 든 소녀〉
1875년경, 캔버스 유화
그림 앞에서부터
〈음악회에서〉 1880년, 캔버스 유화, 99.2×80.6cm
〈그네〉 1876년, 캔버스 유화, 92×73cm
빛과 밝음, 그리고 기쁨의 결합
프러시아 전장에서 2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르느와르는 1874년 그의 총감독 하에 협회를 조직하고 전시회를 개최했으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냉담한 반응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화상 '뒤랑 루엘'과의 만남으로, 다른 화상들과의 교류와 후원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
이후 두 차례 살롱전을 통과하게 된 그는 1979년 〈사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엄청난 찬사와 함께 부와 명성을 얻게 되어 파리에 스튜디오를 갖게 되고, 나이 40에서야 19세 연하인 〈20세의 모자상〉 주인공인 Aline Charigot를 아내로 맞게 된다.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인 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하였으며, 그의 고전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 새로운 예술에의 집요한 탐닉 등은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그가 꿈꾼 새로운 변혁, 즉 고전적 기법과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그리고 기쁨의 결합은 매우 성공적인 르느와르의 회화를 완성시켰다.
이런 철저한 연구와 작업은 여체의 관능적 표현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만일 여인의 유방과 엉덩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