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 선조들 중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미술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사회적 제도와 풍토에 의하여 나타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미술인들을 천박한 직업인으로 취급하였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작품을 제작하였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작품들이 보관상 소실되어 오늘 날까지 전해지지 않아 무명 미술인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선조들 중에서 유명 미술인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전적 속에 기록되어 있거나 운좋게 그의 작품이 여러가지 연유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전문적 화가의 부류로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圖晝署 화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도화서에서는 궁중에 필요한 단청, 병풍, 그외 여러가지 미술품들을 궁궐의 장식과 왕가의 필요에 의하여 제작하였는데, 여기에서 일하는 화원들도 일종의 장인으로서 벼슬을 얻었으며 궁중의 미술 관계 일을 도맡았던 것이다. 다른 한 부류는 일반 사대부 출신으로서 평소 여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수양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였는데, 그림에 뛰어 난 사대부의 양반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크게 전문 기능인인 화원 출신들과 비전문가인 사대부 양반 출신 화가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安堅은 화원 출신이다. 자는 可度, 得. 호는 玄洞子, 朱耕이라 전하고 있으나 그의 생년이나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그림 그리는 재주는 다재다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상화 · 화조 · 사군자 · 말 그림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을 그렸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그의 다재다능한 재주에 대하여 金安老가 쓴 龍泉談寂記에 의하면 “안견은… 고화를 많이 보고 그 깊은 곳에 있는 뜻을 얻어 그리는데 있어 곽희의 그리는 방법으로 그리면 곽희의 그림이 되고 이필의 방법으로 그리면 이필의 그림이 되었는데, 유용이나 마원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뜻하는 대로 못그리는 것이 없었지만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였다.”라고 전하고 있어 그의 재주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산수에 능통하여 자신의 시대에는 물론 후대에 있어서도 당대 제일의 산수화가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선비들의 문집에서도 비교적 자주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특히 安平大君이 직접 안견으로 하여금 자신의 꿈 속에서 겪었던 桃源의 仙境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그 당시 화원들 중에서도 안견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학계에서 안견의 진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夢遊桃源圖 한 폭뿐인데 이는 일본에 있다. 나머지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은 그의 작품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견에 대하여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안견이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한다. 단지 안평대군이 그의 곁에서 그림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하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안평대군이 1435년 무렵부터 1445년까지 많은 중국의 유명 서화품들을 수집하였으며, 이를 안견과의 논의를 통하여 중국 유명 화가들의 특성과 기법을 파악하였다는 추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견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眞作인 몽유도원도는 비단 두루마리에 일부 담채된 목화 산수로 그려져 있으며, 안평대군이 朴彭年 등과 같이 도원을 꿈 속에서 보낸 후 일어 난 夢幻을 안견에게 설명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447년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3일만인 23일에 완성을 보았다.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그려졌기에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과 詩 한 수를 비롯하여 申波舟와 李增 그리고 鄭麟趾 · 朴彭年 · 徐居正 · 成三問 · 李賢老 · 金守溫 · 尹子雲 등 당대 제일급의 문인묵객 · 학자 · 명신 등 20여명이 문장과 서예의 역량을 자필로 적었고, 한명의 스님이 쓴 글을 포함하여 모두 23편의 讚文이 곁들여져 있어 이 그림에 대한 안평대군의 관심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그가 꾼 꿈의 내용이 도연명의 桃花源記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몽유도원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 아래 부분에는 현실세계가 묘사되어 있고 오른쪽 상단부에는 도원 선경이 묘사되어 있어, 왼쪽의 현실세계에서 출발하여 점차 도원의 선경인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몇 무리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의 무리들은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서로 이어져 조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산의 형태들은 당대의 화풍인 郭陶派를 따르고 있는데 현실의 산이 아닌 이상적인 산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양화 표현에 있어 세 가지 원근법인 平遠(넓고 평평한 표현), 深遠(깊고 먼 것을 표현), 高遠法(높고 원대한 표현)들이 두루 잘 드러나 넓은 공간감과 높은 산 그리고 깊은 골짜기들이 잘 표현되어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으며, 필묵법이나 준법 등이 중국 곽희파의 영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의 작가인 안견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그의 진품으로 전해지는 일본 천리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미술사의 기록에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안견이 대가로서 그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의 역량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당대 제일의 宋雪體의 서예 대가이며 정치권력자인 안평대군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과 소헌 왕후 사이에서 셋째 왕자로 태어나 이름은 瑢이며 자는 淸之, 호는 脂解堂 · 琅刊居士 · 梅竹軒이라 하였고 시호는 章昭이다. 안평대군은 1418년에 태어나 1453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안평대군은 서예에 뛰어났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그림 수집가이다. 그는 17세 무렵인 1435년경부터 1445년까지 약 10년 동안 중국 서화 약 192점과 안견의 작품 약 30여점을 포함하여 무려 222여점 이상의 서화를 수집하였던 것이다. 이 수집 작품 가운데 곽희의 작품이 17점이나 있어, 안평대군이 곽희 또는 곽희파의 화풍을 좋아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개 옛 작품들의 이해에 있어 시대적인 주변 여건을 같이 이해하여야만 하는데,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도 예외가 아니게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막연한 감탄과 칭찬으로서 미화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몽유도원도가 그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곽희 화풍의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중국 우월주의의 관념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 그 시대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작품들이 없기에 희귀성과 함께 그 시대 대표적 그림의 동향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