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조선조 화가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는데 있어 초기를 安堅, 후기를 鄭敵과 金私道, 말기를 張承業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초기의 그림들이 대체로 중 국의 그림을 그대로 이어가는 山水, 人物, 그리고 四君子 등 사대부 취향의 그림들이 많이 나타났다면, 후기에는 조선의 산하를 그대로 묘사하는 眞景이 나 풍속이 많이 보여지고 서민 취향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회화에서 서민적 취향의 경향을 표현하는 가운데 진경산수화와 함께 유행된 것은 풍속화이다. 이 풍속화에서는 그 당시 조선사회의 여러 가지 생활상들을 묘사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우리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 후기 풍속화에 있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檀園 金弘道와 惠園 申潤福을 들 수 있다. 김홍도는 서민 생활의 풍속화를 잘 그렸으며, 신윤복은 귀족 생 활의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이들은 조선조 미술, 아니 한국 미 술문화에 있어 풍속화라는 장르의 성립을 보았던 것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로서 1745년에 태어나 1816년경에 사망하였으며, 그림은 約菴 姜世見에게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활동하였던 기간은 오늘에서 보자면 불과 200여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인의 화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생년 및 행적에 대하여 기록적 자료는 없는 셈이다. 그런 가운데 우봉 조희룡의「壺山外史」속에 있는 ‘김홍도전’, 표암 강세황의 「豹約遺稿」에 수록된 두 편의 단원기’ 그리고 약간의 작품평들이 그의 당시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최대의 자료이다.
자료에서 나타나는 단원의인 품과 천부적 재질에 대한 당시 명사들의 글을 보면,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에서는 “…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며, 보는 사람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곳에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품이 거문고와 피리의 청아한 음악을 좋아하여 꽃피고 달 밝은 밤이면 간혹 한 두어 곡조를 연주하며 스스로 즐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白華子 洪愼獸는「복헌 · 백화 시화 합벽첩의 발문에 “… 김홍도는 나이 30세가 되기 전에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그가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외모가 빼어나고 풍채 또한 뛰어난 속계의 사람 같지가 않다. …”고 하였다. 여기서 김홍도의 외관과 성품을 엿볼 수 있는데, 풍채가 헌칠하였으며 세속에 초월하였고 그림을 잘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또 김홍도가 음악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의 그림「신선도」 등에서 보면 악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음을 볼 수 있는 것도 음악을 좋아함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동취적」
현존 기록인 오세창의「槿橫域書徵」에서는 “화원 중에서는 제법 선비의 태도가 있고 또 글 씨에도 능했으며 인품이 높고 평이 높아 그 당시 명인이었던 競齋 金得臣, 臺生館 崔北, 古松流水館 李實文과 친하게 사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기 어려워 그림 속에 쓰여진 題詞 및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 있는 기록을 보고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국민학교 역사책에서부터 익혀온 김홍도에 관련된 인식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로서 특히 인물 묘사에 뛰어났으며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들을 그 시대적 현실감이 돋보이게 표현한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주로 인물이 주가 되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인물화를 보면 초기 약 30 〜40대에서는 그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道釋信仰에서 나타나는 道釋人物畵를 많이 그렸으며 초상화도 잘 그렸다. 그러나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풍속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풍속화를 보면 조선 후기 서민들 삶의 표정과 모습들을 그려 놓고 있는데, 가끔 해학적 풍속을 그려 놓기도 한다. 그의 대표적 풍속화로는 소년을 초점으로 하여 훈장과 소년들이 둥글게 앉아 있는「서당도」와, 구경 꾼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고 가운데 씨름을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씨름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생활의 주변적 소재들을 간략하면서도 재치있게 그려낸 풍속화라 할 수 있다.
이들을 보면 김홍도는 풍속인 물화에서 능란한 구도와 풍부한 해학을 동시에 구사하여 냄으로 써 오늘날 평가받는 풍속화가로서 그 위치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조선 후기에 있어 서민 취향의 진경산수풍경화의 완성을 겸재 정선이 이루어 내었다면, 풍속화에 있어서는 김 홍도가 이루어 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매도」
한편 김홍도의 작품 세계에 있어 풍속 · 인물화에 대한 많은 칭찬에 비하여 산수풍경이나 草蟲圖, 사군자 등의 작품에 대해 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인물 · 풍속화 외에 산수 풍경은 그 특유의 표현방법으로 개성적 표현이 돋보이고 있는데, 그의 화첩에서 보여지는 바다 풍경과 그 특유의 산수 표현 기법인 붓놀림에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즉, 이전 화가들의 작품들이 무개성적인 중국풍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에서 머물고 말았다면, 김홍도는 산수 풍경 표현에는 독특한 붓자 국을 사용하며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거친 붓자국과 스케치 같은 담백 하면서도 단순하게 자연의 특징을 잡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특유의 현대적 감각이 많이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草蟲의 섬세한 묘사에도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다. 그림「화접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섬세한 식물의 묘사와 나비의 표현은 산수 풍경에서 보여지는 거친 붓자국으로 생략적인 표현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섬세한 묘사를 보이고 있어 김홍도의 역량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사군자에 있어서도 1804년경에 그린「老梅圖」를 보면 이전에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사군자의 매화나무와는 확연히 다른 그의 개성적 표현을 볼 수 있는 데, 거칠면서도 늙은 매화나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절에서 탱화를 그리는 것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수원의 용주사 탱화가 그 것이다. 이는 용주사의 사적 중 대웅전에 있는 삼존여래를 단원이 그린 것으로 명기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현재 용주사에 그대로 유존되어 있는 탱화는 숭배의 대상으로 근엄하게 그려져 있으며, 당시에 전례없는 입체적 묘법을 살려서 제작 하였다. 이 입체화법은 새로운 수법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비선검무」
우리는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를 두고 훌륭한 작가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훌륭한 작가라 함은 모방을 하되 그 모방에 머물지 않고 작가 나름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방법을 이루어 내었을 때 우리는 그 작가를 두고 훌륭한 작가라고 하는 것이다.
김홍도 역시 처음부터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여 한국적이면서 조선 현실에 맞는 작품을 제작 한 것은 아니다. 그도 조선시대 화원들이 겪어 왔던 회화 교습 과정인 끊임없는 모방 표현을 하여왔다. 그러나 그 모방에 머물지 아니하고 자신의 독특한 표현방법을 창출하여 내었다. 즉, 앞 시대의 작품을 두고 계속 모방하면서 그 역량을 다져 화원이라는 자리에서 연연하며 양반들의 눈이나 즐겨주면서 지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독자성을 기반으로 하여 서민생활에 접근 하는 조선적 사회 현실성이 담긴 작품을 이룩해 내었던 것이다.
우리는 김홍도가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물 · 풍속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여 그 성과를 평가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김홍도의 삶과 작품 세계를 보면서 한 사람의 작가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그 작가가 살아왔던 사회적 배경도 중요하겠지만, 작가가 어떠한 자세로 작품 표현에 임하여야 하는지, 또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파악 하여야 하며 그 시대성을 어떻게 조형화시켜 내어야 하는 것 인지 하는 작가로서의 자세도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