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감하는 세밑,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바빠지게 마련이지만 잠시 짬을 내어 겨울 여행을 떠나보자. 철 지난 겨울 바다와 포구, 그리고 역사 유적지를 아우르고 있는 곳이라면 더 좋을 듯싶다.
이번에 소개하는 경주 감포가 바로 그런 곳이다. 흔히 경주 하면 불국사나 석굴암, 토함산을 떠올리기 쉽지만 감포 주변의 멋들어진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죽어서도 용이 돼 왜구를 막겠다던 문무왕릉 있어
감포는 경주시내에서 불과 30분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그러나 다른 명승지에 가려 여행객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경주에서 감포 가는 1백여리 길은 도로 양쪽으로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대종천을 따라 감포로 가는 이 길은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길 주변에 널려 있는 유적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고.
경주 보문단지에서 추령고개를 넘어 929번 지방도로를 따라 양남 쪽으로 7km쯤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을 해 대종천 다리를 건너면 대본 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대왕바위'가 있는 감포 앞바다이다. 뭍으로부터 200미터쯤 떨어진 이 바위섬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밀려드는 파도에 씻겨 앙상한 뼈를 드러낸 듯한 대왕바위는 이제 갈매기떼의 쉼터가 돼 있다. '죽은 뒤에 용이 돼 동해로 침입해 노략질하는 왜구를 지킬 터이니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라고 유언한 뒤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위 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는 유골을 안치했고 사방으로 일정한 양의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드나들 수 있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감포를 일컬어 '노천박물관' 이라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 유적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 때문이다. 함월산 자락에 안긴 기림사는 대적광전(보물 제833호)을 위시해 각종 국보급 보물과 희귀 불교 자료 350여점이 소장돼 있다. 특히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당시에는 흔치 않던 목탑터도 발견돼 눈길을 끈다. 기림사 나들목에는 '한국판 돈황석굴'로 불리는 골굴암이 자리하고 있다. 그 꼭대기에는 자애로운 기품이 서린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 지긋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화강암에 새겨진 이 불상은 문무왕릉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마애불 절벽 곳곳에는 모두 22개의 석굴이 뚫려 있다.
기림사를 빠져나와 929번 지방도로를 타고 대본리로 오다 보면 왼편 언덕 위에 거대한 3층 석탑 2기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감은사지 3층석탑이다. 감은사 쌍탑은 보면 볼수록 웅장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삼국통일의 과업을 달성한 신라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감은사는 태종 무열왕의 장남인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완공하고 이름을 '감은사'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절터와 탑 2기만이 덩그라니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두 탑의 규모와 형태는 똑같고, 높이는 13.4미터에 이른다.
대왕바위에서 북쪽으로 400미터쯤 떨어진 해안 언덕 위에는 문무대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견대'가 있다. 이곳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피리를 불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전설적인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만파식적은 말 그대로 만가지 파도(근심)를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
바다에 큰 풍랑 일면 종소리 들린다는 전설 내려와
감포 바다에는 또 한 가지 전설이 전해오는데, 그것은 바다에 풍랑이 심하게 일면 큰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그 전설의 유래는 이렇다. 고려 고종 25년(1238년) 경주 황룡사에 몽고군이 침입해 구층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를 불태워버렸다. 그 당시 황룡사에는 에밀레종보다 훨씬 더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고군은 그 종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려고 배에 실어 동해바다로 나오는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게 일어 배가 침몰하면서 종도 바다 밑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 뒤부터 동해바다에 풍랑이 심하게 일면 종 우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고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는데, 그 종소리의 주인공은 황룡사 종이 아니라 감포 바다에서 내륙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감은사에 있던 종으로 임진란 때 왜병들이 가져가려다 바다에 빠뜨린 것이란 얘기가 그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신비한 전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감포는 사철 답사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역사 순례지가 돼 버렸다.
구룡포와 감포의 중간쯤에는 포구다운 멋이 물씬한 양포항과 그 안쪽에는 계원리 포구가 있다. 아담한 야산이 둘러싸고 있는 양포항은 수십 척의 어선들이 낯을 내리고 있으며 방파제를 따라 올망졸망 들어선 횟집이며 상가들이 여느 포구의 그것처럼 제법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진입한다. 경주 시내 서라벌로-고속주유소-구황로-보문 단지 남쪽-덕동호-국도 제4호-추령-양북면 어일리 삼거리-지방도로 제929호-대본삼거리-문무대왕 수중릉-감포항을 잇는 코스를 이용한다. 대중교통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있는 감포나 양남행 버스를 타고 어일에서 하차, 기림사행 시내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한다. 대왕암, 이견대는 기림사 입구 어일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양남행 버스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