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살피는 것이 그 첫 순서이다. 왜냐하면. 일본 문화의 바탕이 되어 온것은 불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일본 문화와 일본의 정치체제를 이루어 준 것은 한국 불교였던 것이다. 서기 538년에 백제 제26대 왕인 聖王(523〜553년)이 일본땅에다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주었다. 그일이 일본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해서, 장차 일본이 불교 국가로서 정치 체제를 이룩한 기본이 된 것이다.
□왜왕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어명한 백제 성왕
일본 고대에 나온「扶藥略記」라고 하는 귀중한 역사책이 있다. 11세기경에 나왔으니 지금부터 약 900년 전에 쓰여진 옛 기록이다. 이「扶秦略記」의 飮明天皇(538〜571년)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고대 역사가 나온다.
‘서기 538년 음력 10월에 백제국의 성왕께서 금동석가불상과 경전을 보내 주셨다. 성왕께서는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법 이므로, 세상에서는 이를 따라야만 한다. 불교는 최상의 법 이므로 왜나라 왕도 역시 이 법을 수행해야 하며, 불상을 받들어 모셔야 한다. 그 까닭에 불교 法師를 使臣과 함께 파견하노라고 하셨다.’
이밖에도 다른 고대 일본 역사책에도 역시 백제의 성왕이 그 당시 왜나라였던 일본에 처음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하였다는 기록들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6세기초에 백제에서는 일본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포교하면서 백제의 국위 선양뿐 아니라, 실질적인 왜나라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왜나라에 불교를 펴던 당시의 왜나라 왕실의 최고 대신은 蘇我稱目(서기 570년 사망) 좌대신이었다. 이 소아 대신은 백제인이다. 그의 증조부는 백제의 개로왕(455〜474년) 때의 중신이었던 木滿致이다. 목만치 대신은 왜나라로 건너가 왜나라 왕실에서 활약하면서 대권을 장악한 사람이다. 이때 목만치 대신은 성씨를 蘇我씨로 바꾸었던 것이며, 그의 아들이 蘇我 韓子이고, 또한 그의 손자는 蘇我高麗이며, 증손자가 앞에서 밝힌 좌대신인 소아도목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현재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가토와키 테이지(門B植三) 교수 등도 논술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 고대의 전적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입증된다.
좌대신 소아도목은 백제의 성왕이 흠명천황에게 불상과 불경을 보내 주자 앞장서서 모국인 백제 불교를 열성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소아 대신의 저택은 나라(奈良)의 아스카(飛鳥) 지방 왕궁 근처인 무쿠하라(向 原) 언덕에 있었다. 소아도목 대신은 흠명천황에게 불상을 자기 저택에 갖다 모시겠다고 주청했다. 흠명왕은 쾌히 응낙했다. 이래서 소아 대신은 자기 저택에 불당을 마련하고 백제 성왕이 보내준 금동불상을 모시고 예불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제인 소아도목 좌대신이 자신의 저택에 세운 向原寺가 왜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불사가 된 셈이다. 그러자 아스카 지방의 백성들은 다투어 향원사를 찾아 줄지어 왔다. 이제 모국땅 백제 불교는 소아도목 대신의 저택인 향원사에서 새로운 포교의 활기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한국 불교는 왜 나라 땅에서 앞으로 순탄하게 종교의 기반을 이루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못했다.
□선진국 백제로부터 문화를 배우게 된 왜나라
그 당시 왜나라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백제인이며 신라인, 고구려인들이 나라 땅을 중심으로 살면서 왕실이며 각 지역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은 백제인들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백제인들이 왜나라 섬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4세기를 전후한 시기였다. 더구나 그들은 나라의 아스카땅뿐이 아니고 지금의 오사카(大K)인 나니와(難波)며 그 일대에 널리 퍼져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왜나라 각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4세기를 전후해서 백제에서 왜나라로 건너간 초기의 지도 자는 阿直또 선생을 비롯해 유학자였던 王仁 박사 등을 먼저 손꼽게 된다. 특히 왕인 박사에 의해서, 글자가 없었던 미개한 일본땅에 한자어가 전해지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 본 고대 문화의 여명이다. 일본 학자들도 고대 선진국인 한국인들에 의해 왜나라 문화가 싹트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도시 이름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나라 (奈良)’라는 한자어의 표기는 우리 한국어의 ‘나라’ 즉, ‘國 家’에서 생긴 고대부터의 말이다.
그러므로 고대 왜나라의 수도였던 ‘나라’는 바로 ‘한국의 국가’를 뜻하는 것이라고 저명한 고어학자였던 요시타 도고(吉田東伍) 박사며 마츠오카 시즈오(松岡靜雄)교수,나가시마 후크타로(永島福太郞)교수 등등이 「고어대사전」 등을 통해 입증한 바 있다.
나라땅에서 백제가 왕실의 지배자로서 일본 문화를 일으킨데 대한 저명한 학자들의 논문 등을 간단히 몇 대목을 인용하고 나서, 한국 불교의 포교와 그 수난사 등을 살펴 보는 게 순서가 될 것 같다.
백제 문화는 일본보다 일찍 발달했다. 일본은 백제 문화를 받아들였고, 백제 사람들의 힘으로 일본은 발전하게 되었다. 그것은 백제 문화의 선진성을 말해준다. 백제 사람들이 고대 한국의 여러가지 제도에 따라서 법령을 만들고, 왕실의 문서 기록이며 물자관리 등을 담당하는 고관이 되어 일본의 문화며 생산을 지도해 주었다.’(井上光貞,「日本國家の 起源」.
‘선진국인 한국인들은 고대에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살게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에 의해 일본 문화를 발전시켜 주었다. 그들은 그와 동시에 큰 부귀를 누리면서 번영했다.’(石橋五郞「曰本地理學大系」⑦)
‘백제라는 국가는 일본에 혁명적으로 문화를 가르쳐 준 스승의 나라이다. 불상은 물론 이거니와 그밖에도 미술·공예·학문·技藝에 있어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백제라는 지명이나 명칭 등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岡部伊都子,「佛像を思う」)
□파불 소동을 일으킨 물부 대신 일당
백제 성왕의 불교 전파가 왜나라에서 소아 대신에 의해 활기를 더해 갔다. 그러자 이에 위축되어 불만이 커진 것은 역시 왕실의 실력자인 우대신 物部尾興와 그의 아들 物部守屋 등 일파였다. 이들 물부 우대신 일당은 巫俗 등에 의해 山神 등 원시적인 신앙을 주도해 오던 세력이다. 그들은 섬나라의 무지한 원주민들을 거느리면서, 지금까지는 순탄하게 자기네들의 소위 國神 신앙을 내세워 왔던 것이다.
백제에서 훌륭한 금동불상이 모셔져 오자마자 이들 물부 일당은 위축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모국인 백제에서. 백제 지배하의 나라 왕실로 불교가 새로운 신앙으로 들어오자, 왕실을 비롯한 한국인 지도자들이며 일반 백 성들까지도 일제히 불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이에 물부 일당은 이러다가는 그네들의 무속적인 신앙이 멸망될 뿐 아니라, 왕신에서 제2위의 대신이라는 세력마저 위태롭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물부 대신 일파는 즉각 불교를 배척하는 排佛派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교를 맹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소아 좌대신 등 한국인들이 왕실의 최고 실권을 쥐고 있으니, 그들은 무슨 수를 쓰든지간에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서 불교를 他國神 등으로 몰아세우면서 발버둥쳤다.
소아도목 대신의 노력으로 향원사의 불교 활동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 후 서기 570년에 소아 대신이 세상을 떠 났다. 그러자 뒤이어서 그의 아들 소아마자(馬子)가 세습해서 좌대신이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나라땅 일원에는 그 당시 무서운 전염병인 천연두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마마’라고 부르는 천연두가 창궐하면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때를 놓칠세라 물부 대신 일당은 천연두의 발병이 한국에서 건너온 타국신인 불상 탓으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국신을 배척하고 타국신을 섬기기 때문에 국신이 노여워서 병을 퍼뜨리셨다.”
이런 소문이 삽시간에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다. 물부 대신은 왕실로 흠명왕을 찾아가서 상소하는 것이었다.
“국신의 진노를 거두기 위해 서는 불상을 때려 부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병 때문에 모든 사람이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흠명왕은 입지가 매우 난처 해졌다. 최고대신 소아도목의 본국 불교의 포교도 중요하기는 하되, 그렇다고 천연두의 창궐로 불안에 떠는 민심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우직한 주민들도 천연두에 겁을 먹은 나머지 불교를 등지기 시작했다. 물부 일당은 흠명왕에게 강력한 상소를 했고, 이에 왕은 어쩔 수 없이 배불파의 행동을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물부수옥 일당은 즉각 군중들을 몰고 소아도목 대신의 저택인 향원사로 달려 갔다. 그들은 향원사를 불지르고. 백제의 금동불상을 난폭하게 끌어내서 나니와의 掘江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불상을 강물 속에 던지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때가 서기 570년이다. 소아마자 좌대신은. 역시 우대신으로 세습한 물부수옥의 만행을 와신상담하면서 복수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복수는커녕 서기 585년에, 소아마자 대신은 다시 한번 물부수옥 대신 일파에 의해서 두번째의 파불 난동을 겪게 된다. 그러나 사악함에도 한계는 있었다. 물부수옥 일당은 서기 587년에 왕권 찬탈을 모의하는 반역행위로 처단 당하고야 만다.
이제 나라땅 아스카에서의 한국 불교는 두번의 큰 수난을 마지막으로, 재흥의 빛나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소아마자 대신은 그 후 서기 592년에는 드디어 아스카땅에다 한국 불교의 대가람인 法興寺의 찰주를 세우는 것이다 이 날 만조백관은 모두 백제옷을 입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찰주를 세우는 법요에 참례했다는 것이「부상약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일본은 불교 국가로 발전하면서, 한국 불교 문화에 의한 일본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