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망
당선 소감
아침에 당선 소식을 접했을 때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9월 한 달 동안 원고지와 싸웠던 아픔이 서서히 치유됨을 느끼고서야.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학교 때의 일입니다. 일기장을 검사하신 선생님은 나의 일기에 성의가 있다며 급우들에게 소개를 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장독 옆 한 평 남짓 한 공간에 꽃밭을 일구어 피어나는 꽃들을 보고 쓴 글입니다. 꽃을 사랑 하는 마음은 거칠어진 정서를 다듬어 줄 뿐 아니라, 나아가 애국하는 길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유치원 수준의 일기를 써오고 있지만 늘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 싶습니다. 쓰러져 가는 들꽃에 발걸음을 멈추고 어루만져 주신 주위의 모든 분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문학에의 소망을 담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장기양
·전남화순출생(1957년생)
·명지전문대 행정학과 졸업
·전우신문 장병문예 장려상 수상(1979년)
·전국공무원문학협회 이사
·교통방송통신원
·현재 서울 모래내우체국 근무
작은 소망 - 장기양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하지만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아니라 작은 결실이 있기까지의 과정 또한 소중하다고 여겨, 있는 그대로의 자화상을 엮어볼까 한다.
어린 날의 추억은 가난한 살림에 교육 환경 역시 빈약하였다. 1973년에 고교 2년을 중퇴할 때도(지금 같으면 휴학이라도 하여 공부하고 싶을 때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지만) 내의견은 거의 무시된 채 일부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소망은 마음 한구석에 그대로 간직해 두어야 했다. 살아가는 현실은 공부하고자 하는 바람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청소년 시절의 뜻을 이루기에는 주어진 여건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환경을 탓한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조그마한 문고본이나 단행본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안병욱 · 박목월 · 김형석 · 김동길 그외 몇몇 교수님들의 인생론이나 수필집을 읽으며 메마른 정서를 살찌워 나갔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김형석 교수 님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방향 설정에 큰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장사하면서 생활 전선에서 뛰는 동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일터가 필요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후 이웃집에 사는 노량진전화국 직원의 소개로 전화국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8개 월 정도 고용직으로 일하면서 한편으로 늘 앞 날에 대한 걱정을 해왔었다. 그 해에 체신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을 치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고, 공무원 임용등록을 마쳤다.
1982년에 전화국이 신설된 공사로 넘어가면서 정규 직원이 아니므로 그만두어야 했다. 두 세달 공백기를 지나 부흥개발이라는 전화가설 업체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가입 신청을 해도 2〜3년은 기다려야 전화를 가설해줄 정도로 그 사정이 좋지 않았다. 부흥개발은 전화가설업체로서 전화국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국간 중계(전화국과 전화국) 케이블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신규 전화가입자에게 즉시 가설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6월 어느 날 서부서울우체국(현재의 은평우체국)에서 11일부터 출근을 하라는 발령통지서를 받았다. 우체국 출근 하루 전날 작업을 하면서 현장 소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현장 소장은 일을 마치고 다방으로 안내했다. 차를 마시면서 소장은 보수를 원하는 만큼 올려 주겠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정규 직원이 아닌 바에야 물질적인 풍요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우체국 봉급은 개인 회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내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내린 용단이라 그날 밤 현장소장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1982년 6월 11일. 새로운 각오로 출근에 임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은 그대로 곱게 보아 주지 않았다. 이미 신규 임용자들이 더러 와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나이는 스물여섯, 학력이라고 해야 고교 2년 중퇴가 고작이었다. 가난을 못이겨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아픈 과거를 뒤로 하고. 모든 것은 환경을 탓하며 흐르는 세월에 맡겨야 했다.
직장에서 초년병이니 아는 사람도 없고, 선배 들의 도움에 많이 의지해야 했다. 어려운 우편 배달업무를 수행하면서 의외로 꿈과 현실은 달랐다. 뜨거운 뙤약볕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종일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다. 홍은동 338-5512로 가는 우편물이 눈에 띄었다. 해당 주소가 없는 것이다. 규정대로라면 당연히 반송 해야 한다. 하지만 내용물이 소중해 보여 주인을 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받는 사람은 아무래도 저명 인사인 듯 싶었다. 발송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저도 수필을 좋아하는데, 우편물을 반송하려다가 현재 보관하고 있으니 주소를 다시 확인하여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내 이름으로 개인 수필집이 도착했다. 책 속에 끼어 있는 편지를 읽어 보니 “주소는 홍은동 206-55이고 전화번호는 338-5512인데, 그만 전화번호를 주소로 알고 한 일이니 그대로 잘 전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다. 그리고 보내주는 책은 수필을 좋아한다니 나에게 선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주소는 내 담당이 아니었다. 새로운 주소를 적어 담당자에게 건네주면 당연히 전해지겠지만 이 우편물은 꼭 내가 전해 주고 싶었다. 배달업무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직접 찾아 나섰다. 집을 간신히 찾아 초인종을 누르니 노인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다. 우편물에 대한 사연을 말하고 그 책자를 건네주고 나오려는데, 노인은 어느새 내 손을 끌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매사를 귀하게 여기면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현관을 들어서니 서재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그 우편물의 주인공이 노인임을 깨닫고서는 더욱 고개가 숙여졌다. 아마 청탁 받은 원고를 쓰는 중인 듯했다. 차를 한 잔 손수 끓여 주시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수필에 관한 귀중한 말씀도 해주었다. 더구나 당신이 손수 쓰신 수필집과 함께 몇권의 책도 건네받으니 이보다 융숭한 접대가 어디 있을까.
그 후로 가끔 찾아 뵙기도 하고, 편지로 수필 지도를 받기도 했다. 몇해 전 서울을 떠나 위성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내게는 늘 존경의 대상으로 격려가 되고 있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소중한 보람이다.
1983년 5월 지역 편제에 따라 남가좌동 · 북가좌동 · 홍은동 지역을 배달하는 직원들이 서대문우체국으로 옮겨 왔다. 우편 배달업무는 종전과 같다. 지역 주민을 위한 방안을 궁리한 끝에 어린이들 몇명을 우체국에 초대하여 우편물이 접수에서 배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이듬해에도 초등학교 6 학년 세 어린이들을 견학시켜 주고,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나누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미래에 대한 꿈이 듬뿍 담긴 이 어린이 들을 통해 나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다 새로운 꿈을 꾸어 나갔다. 그러한 인연이 성공적이어서일까. 세 어린이는 모두 대학에 진학하여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길가에 한 노파가 쓰러져 있었다. 깜짝 놀라 흔들어 깨우니 술 기운이 조금 있고, 집에 가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쁜 일과 중에 일어난 일이라 황급히 서둘러야 했다. 지나가는 승용차를 세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골목들을 지나 1km쯤 가서 어렵게 집을 찾았다. 요즘 말하는 치매 증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방 한 칸을 세들어 혼자 지내고 있었다. 멀리의 가족으로부터 가끔씩 연락이 온다고 들었으나 할머니네 가족을 본 적은 없다. 지나는 길에 할머니의 방을 들여다보면 방안에 혼자 앉아 있거나 또한 거리에서 쓸쓸히 지내는 모습을 접하곤 한다. 어디선가 나를 보면 달려와 언제 구멍가게를 다녀왔는지 음료수를 건네며 스쳐 가는 인연을 소중히 여겨 주었다. 이제 어디로 떠나가 살고 있는지 할머니의 소식을 알 수 없지만. 할머니와의 작은 인연은 고향에 계신 팔순 어머님을 가끔씩 생각나게 한다.
가을 어느 날이다. 청소하는 아빠를 돕고 있는 어린이가 눈에 띄었다. 어린이에게 다가가 몇마디 말을 건네면서 칭찬도 곁들여 줬다. 잠시 나누는 대화 속에 홍은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세한 사항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아빠를 돕는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얼마 있으면 중학교에 진학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점으로 달려갔다. 중학생에게 알맞는 영한사전을 한 권 구입했다.
배달을 마치고 홍은초등학교 교장실을 찾았다. 교장선생님께 유창남이라는 6학년 학생의 효성이 지극한 사연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선행상이나 효행상을 이 학생에게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을 드렸다. 영한사전을 건네받은 교장선생님은 이 학생이 졸업반이라 표창은 쉽지 않으나 내 뜻을 담아 그 학생을 격려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고 하였다. 초면이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경청해 주시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내게도 힘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이다. 거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반색을 한다. 청소하는 아빠를 도왔던 창남이 어머니였다. 아주머니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창남이 졸업식이 있던 하루 전날 엄마도 졸업식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졸업식을 마치고 교장실로 초대받은 모녀는 깜짝 놀랐다. 몇몇 선생님들이 뜻을 모아 준비하였다며 모녀에게 금일봉과 영한사전을 건네주시더란다. 그리고 한참 동안 격려를 받았단다. 창남이 엄마는 나에게 어린 딸에 대한 관심에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고 하였다. 어느 날 창남이네도 우편물이 있어 방문하였다. 마침 식사시간이라며 가족들이 안으로 들어오란다. 잠시 식사를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언제나 바쁜 시간은 나를 오래도록 머물게 하지 않는다.
동네 어린이들은 편지아저씨가 무엇이 좋기에 자꾸 따라다니는 걸까. 심지어 어떤 아이는 내게 발길질까지 했다. 그러나 나를 좋아하는 행동으로 보고 더욱 예뻐하며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기도 하였다. 어린이들이 한꺼번에 따라 다니는 모습이 더욱 천진스럽기까지 했다.
해가 짧은 겨울은 일찍 어두워져 업무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피곤하여 쓰러질 것 같은 상황도 종종 있었다. 마지막에는 기운을 차려 어린이들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한두명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니 대환영이다. 그러나 예의상 부모를 찾아 허락을 얻은 후 20〜30분 정도 우편물 뭉치를 들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무거운 우편물을 들어주니 힘이 샘솟는다. 끝나고 어린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서 건네주며 고맙다고 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어린아이들의 도움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에도 손전등을 활용하여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 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소식을 전하는 일이지만, 주어진 임무에 대하여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소중한 사명을 자각하고 더욱 열심히 뛰었다.
할머니노인정에도 우편물을 가지고 가끔씩 들르면 할머니들은 내 손을 끌며 식사를 하자고 한다. 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과의 대화 속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어 가끔 점심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이다. 아버님이 시골에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황급히 고향에 내려갔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다. 주위에서는 팔순까지 사셨으니 호상이라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곤 했다. 평소때도 거리에서 노인들을 만나면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가끔 있다.
장례를 치르고 올라온 서울은 어딘가 더욱 허전해 보였다. 며칠 지나서 할머니노인회장을 찾아 뵈러 갔다. 아버님 장례를 치르고 올라와 할머니들에게 점심시간에 맞추어 인사차 음식 대접을 하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서 술, 과일, 음료수 등을 인원에 맞추어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여 점심시간에 갖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점심시간에 방문하니 이국땅에서 돌아온 자식을 반기듯 30〜40여명의 할머니들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나의 앞날에 성공을 기원해 주었다. 뜻하지 않는 조의금과 선물을 할머니회장으로부터 건네받으니 코끝이 찡하도록 고마웠다.
노인정에서는 점심 때 할머니들이 손수 식사를 준비하기에, 그 이듬해 추석쯤에는 고기 몇 근을 사다드리기도 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미담이 지역 주민들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전해 져 갔다. 어느 할머니는 이 소식을 접한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며 내 손목을 꼭 잡아주기도 했다.
1983년 봄이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며칠 동안 고민 하던 끝에 공부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같이 일 하는 직장 선배들에게도 허락을 받아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업무를 마치고 서울역 앞 중앙사회복지관의 문을 두드렸다. 교재비만 부담하고 학비는 무료란다. 선생님들은 학생 신분 이거나 직장인으로서 봉사의 일환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때로는 엄습해 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고졸 검정고시의 꿈을 키워 나갔다. 선생님들의 열성 또한 대단했기에 나약한 의지를 바로세워 나갈 수 있었다.
더 멀리 대학 진학에의 꿈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고졸 검정고시를 2년여만에 끝내고 학력 고사를 위해 시내 학원에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였다. 공휴일에는 남산도서관에 이른 새벽부터 달려가 종일토록 책과 씨름하여야 했다. 그러니까 직장 업무에도 충실하는 한편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마치 벼랑에 매달린듯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의 노력 끝에 학력고사를 치렀다. 하지만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아 또 고뇌하기 시 작했다. 이루고 싶은 꿈이라면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모두 물거품이 된 소망을 뒤로 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전문대학에 다니는 주위의 직장 동료가 있어 무엇인가 용단을 내려야 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이라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1986년에 명지전문대 야간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2년 동안의 행정학 공부를 마치고 그 이듬해에는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에 편입하여 잠시 공부하였다.
평소 늘 자식 걱정에 잠을 못이루는 어머님의 소망도 내가 결혼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나이 서른셋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직장 때문에 출석수업이 여의치 않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회고해 보면 몇년 동안 검정고시, 행정학, 국문학에 대한 공부가 나 자신의 내면적인 중실함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1982년 봄 서너달 동안 학원 문턱도 밟지 않고 독학으로 운전면허증을 딴 것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굳센 의지의 결과였다. 몇년 전부터 컴퓨터도 물론 독학으로 익혀 잘 활용하고 있다. 이제 컴퓨터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이제 체신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1983년 7월 1일 체신보험이 탄생했다. 처 음에는 무슨 내용인지 몰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직원들은 체신보험 신규 모집을 하나하나 해오기 시작했다. 그 해 8월 1일부터 9월 15일 까지는 체신보험 모집 증강기간으로 전직원들은 금융상품 판매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나는 보험 모집에 관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에 방관만 하고 있었다. 8월 중순쯤 200여명의 실적이 그래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9월에 들어서부터 은근히 내면적인 각성과 아울러 보험을 모집하겠다는 신념이 싹 트기 시작했다. 일찍 퇴근하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때로는 비를 흠뻑 맞기도 하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우편물을 전하는 순간 순간들을 이용해 체신 보험에 대한 홍보를 하고. 모르는 것은 즉시 우체국에 문의하여 궁금증을 풀어 나갔다. 뛰는 열의만큼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반응이 없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긍정적인 호응에 서서히 힘이 샘솟았다. 첫해 연간 목표가 월 불입액 5〜6만원 정도였다. 그러니까 100만원짜리 계약고 두세건이면 족하다.
처음부터 목표의식은 갖지 않았지만 주워진 목표 달성을 위해 늘 기원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증강기간이 끝나갈 무렵에는 목표를 초과해 나가기 시작했다. 목표 150% 달성에 이어 다음날은 100%를 하루에 초과 달성했고, 마지막날 9월 15일에는 8건을 모집함으로써 월 불입액 30만원을 넘어 목표 600% 달성의 개가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전직원 중에서 5순위까지 진입하여 국장 표창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표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해냈다는 것이 새로운 힘이 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배달지역이 바뀌어 100% 달성에 그쳤지만, 매년 300〜 500%의 목표를 달성하여 업무 수행에 따른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보험을 모집하는데 있어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도 했다. 매년초에는 보험 모집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바쁘면 바쁜 대로 다음에 얘기를 하겠다고 하고, 시간이 있다고 하면 차분히 설득하기 시작한다. 먼저 1982년에 전화국이 공사화된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다음 얘기를 시작한다. 체신부는 전화국과 한 가족이었는데 전화국이 1982년부터 공사화됨에 따라 재정적 분리가 이루어졌고 그결과로 우정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1983년 7월 1일 체신보험이 나왔다고 한다. 먼저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고 반응은 그때그때 메모해 둔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우편물을 전할 때마다 보험에 대한 설명을 한다. 반복적으로 권유하니 서서히 결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가능성이 있는 곳은 몇번의 면담을 통해 보험 권유 기법이 달라진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쓰러져가는 체신부를 위해 무엇인가 기여해 보겠다는 절박한 상황을 얘기한다. 오히려 상대방이 나를 염려하고 체신부를 걱정하며 보험 가입의 대열에 들어선다.
매년 보험 모집에 열성을 갖고 일하다 보니 직장에서도 시선이 따뜻하게 와 닿는다. 지역에 사는 몇몇 분과 직장에서는 그런 열성적인 삶에 감동하여 중매를 서주겠다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이 중요한 것이 아님은 물론 보험 모집 자체도 나의 목표가 아니고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성취해 가는 보람. 바로 이것이 중요했다.
오래 전부터 사회적 봉사도 꿈꿔 왔다. 지난해 봄부터 교통방송 통신원으로 등록하여 봉사해 오고 있다. 시간이 많아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통량이 많은 정체 지역이나 사고 지역을 제보함은 물론 교통시설에 대한 문제점도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지난해 연초에 있었던 일이다. 서대문구청에서 연희로터리 70여미터 못가서 우정스포츠센터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횡단보도 신호는 있으나 지나는 차량들은 70여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의 신호를 보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횡단 보도상에서 급정거하는 등 위험한 상황을 몇번 목격했다. 전체적인 신호등 설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카메라로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구조적 모순점을 지적하는 민원을 서울지방경찰청 교통관리과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며칠 후 횡단보도상에 지나는 차량들이 신호에 의해 움직일 수 있도록 기자 신호등 설치 건의를 받아들여 내가 원하는 바대로 하였다고 민원 회신이 왔다. 확인도 할 겸 현장에 가보니 연희로터리 신호와 후방 70여미터 횡단보도 상의 신호가 동시에 작동. 횡단보도를 지나는 행인들이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지나는 차량들도 횡단보도상에 새로 설치한 기자 신호등에 의해 움직이니까 근원적인 교통 문제가 해결된 셈이다.
또 지난해 8월 5일에는 성산대교에서 홍은동에 이르는 북부고속화도로가 부분 개통되었다. 교통가족들의 많은 기대 속에 이루어진 북부고속화도로이지만, 홍은동 지역에 장시간 교통 체증이 발생하여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무렵 직장에서의 근무 체계는 하루 일하고 그 이튿날 쉬는 것이 반복되는 일과였기 때문에 쉬는 날 오후에 근원적인 문제를 캐내어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조사에 나섰다. 신영삼거리에서 국민대 방향 300여미터 횡단보도에 서부터 신영삼거리. 상명대앞 삼거리, 문화촌, 홍은고가, 녹번동, 연신내에 이르는 신호등을 총망라하여 신호 주기 및 차량의 흐름 상태 등을 정밀 조사하고,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홍은동이나 녹번동 방향의 신호등을 순차적으로 늘려 줄 것을 교통방송국에 건의했다. 이 건의사 항은 10월 11일「출발 서울 대행진」(진행자: 정승원 아나운서) 1부 시간에 방송되었고, 곧바로 홍은동 · 녹번동 방향의 청색 신호가 부분 조정되어 어느 정도 교통 정체에 대한 실효를 거두고 있다.
올해 2월쯤이다. 월곡교차로가 사고다발지역이라는 모 TV방송 보도를 접했다. 쉬는 날을 이용해서 3월 초순 또 조사에 나섰다. 사방 200〜300미터에서 월곡교차로까지 접근하여 신호 주기, 차량의 흐름 상태, 기타 문제점들을 카메라로 하나하나 찍어 사진 자료와 함께 교통사고 감소 방안을 서울지방경찰청 교통관리 과에 보냄과 동시에 교통방송「출발 서울 대행 진」제1부(진행자: 임백천 · 김연주)에 보냈다. 사진 자료와 함께 보낸 민원 내용은「월곡교차로 교통사고 감소 방안」이다. 얼마 후 횡단보도 상(파출소앞)에 n자 신호등을 설치, 보완하였다는 회신이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왔다. 또한 같은 내용이 교통방송을 통해 방송되었음은 물론이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교통 문제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며, 또한 전화로 5회(배한성 · 송 도순 · 윤형주 · 김광환 · 정승원 · 장유진 진행)의 생방송 참여를 통해 그때마다 교통 문제나 우편업무에 대한 국민들의 협조사항을 홍보하였다. 방송을 통해서도 우체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한몫을 톡톡히 한 셈이다.
또한 1994년에 성분헌혈 3회. 지난해는 전혈 1회. 성분헌혈 4회, 올해는 전혈 1회. 성분헌혈 2회를 하여 간접적인 사회 봉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10여년 전부터 은평구 응암동에 위 치한 사회복지법인 선덕원에 매월 후원금을 보냄은 물론 불교봉사단체인 신행회에도 5년 이상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내고, 유니세프에도 가끔씩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많은 후원금을 보내지 못함이 늘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내 힘이 닿는 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생각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는 마음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참여이기에 늘 자랑스럽다.
이제부터 우체국 홍보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한다. 1993년 7월에 발착계로 옮기면서 매일 우편물을 구분하여 발송하고, 전국 각지에서 오는 도착우편물을 구분하여 집배계로 넘겨 주는 것이 주어진 일과였다. 또 24시간 일하고 (09시 출근하여 그 이튿날 09시 퇴근) 그 다음 날은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성미라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본 일이 없다.
가을 어느 날,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는 사촌 동서네를 찾아갔다. 길음시장에 있으니까 가끔씩 찾아가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우연히 생활 정보지를 펼쳐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강북구청에서 무엇인가 현상공모를 하는데 주소 곁에 우편번호가 잘못 인쇄되어 있었다. 강북구 수유3동이면「142-073」이 맞는데「140-073」으로 되어 있었다. 큰일이 났다. 우편물이 지연배달되는 요인이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편물을 분류하며 사고우편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오면서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느라 무척이나 고심 했던 내가 아닌가.
강북구청 문화공보실과「성북벼룩시장」편집 부에 전화하여 강북구청의 주소에 우편번호가 잘못 인쇄되었음을 알리고 어떤 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정중히 요구했다. 그러나 다음 공지사항이 나올 때 우편번호를 바르게 정정하여 내보내겠다는 말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얼른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체국에서 규격 봉투 사용 안내문으로 홍보를 해오던 터라. 지난해 봄 동아일보에 실린 나의 글과 함께 규격 봉투 사용 안내문을 보내 실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반응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얼마 후 무료로 우체국 정보를 실어 주겠다는「성북 벼룩시장」편집부 구명진씨의 응답을 듣고서 서서히 힘이 샘솟기 시작했다.
가까이「서대문벼룩시장」에 전화하여 “우체국 정보가 있으니 게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개인적인 광고는 안실어 주지만 우체국 정보라면 참고하겠다.”며 자료 요청을 하였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하여 팩스로 보내고 우편으로 보내며 다시 전화 방문을 통하여 반응을 지켜보았다. 같은 방법으로 생활정보지 각 지사마다 전화로 우체국의 정보를 게재하여 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하여 긍정적인 호응을 얻어 냈다. 우체국의 공익광고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서대문벼룩시장」에 규격봉투 안내문이 나오는 것을 비롯해「성북벼룩시장」에는 규격 봉투 사용 안내문과 우편제도를 잘 이용하자는 나의 글과 함께 공익광고가 크게 실렸다. 다른 곳에도 규격봉투 안내문과 나의 글을 보내니까 「성북벼룩시장」에 나온 공익광고를 참조하겠다며 자료 요청을 하여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우체국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우체국 정보를 홍보하면서 공익광고의 개념을 서서히 굳히기 시작하였다. 처음 생활정보지 모 지사에 전화를 걸어 편집부에 연결해 달라고 한다. 이어서 정중한 인사와 함께 말을 이어 나간다. '생활정보지라면 대부분 상업광고를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우체국 정보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있어 지금 공익광고를 게재하는 중인데 귀사의 의견은 어떻습니 까? 우체국에 대한 정보가 담긴 공익광고를 실어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귀사의 이미지 개선에도 매우 큰 효과가 기대 됩니다.'라며 문답식으로 정중히 설득하며 부탁했다. 처음 전화 받는 직원들은 경계 또는 주저하는 눈치였으나 자료를 대부분 받아 보고서는 긍정적인 판단과 아울러 수용이 뒤따랐다.
공익광고의 개척이 성공을 거두어 가며 1995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규격봉투 안내훈과 주소를 바로 쓰자는 나의 글, 또 연말연시우편물 이용 안내. 연하장 판매에 관한 것 등 많은 곳에 자료를 보내 실렸다고 들었으며 입수된 자료도 17여 군데나 된다. 생활정보지 지사마다 「정보와 통신」지나 우편번호책자 등 필요하겠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경을 써서 자료와 함께 보냈다.
연말쯤이다. 정보통신부 우정국 영업과에서 발행한「고객을 위한 우편이용안내」를 접했다. 읽어보니 우체국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우체국 정보를 담을 만한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원고를 쓸 참이었다. 그러나 이 자료를 보니 그런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벼룩시장」,「교차로」등의 본사를 전화로 수소문하여 홍보 자료와 함께 공익광고를 게재하여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더니 결국「교차로」기획발전위원회에서 내가 보낸 자료가 공익광고로서 무난하다는 심의 결과에 따라「우편이용안내」공익광고가 전국적으로 실리기 시작했다.「교차로」기획발전 위원회에 전화로 확인한 결과 정기적으로 각 지사에「우편이용안내」광고를 편집하여 모뎀을 보내고 있는데. 모뎀이 연결된 곳은 70〜80% 정도 게재한다고 들었다. 각 지사마 다 연락을 하여 확인하여 보니 충청권을 제외 하고는 전국적으로「우편이용안내」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입수한 자료로는 서울 · 경기 지역과 부산 · 목포 · 순천 · 마산 · 창원 등에서 발행한 것들이다. 혼자서 해낸다는 것이 벅찼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보람도 크기 때문에 모든 홍보 자료를 스크랩하여 지속적으로 정리해 오고 있다.
「교차로」는 26회까지 공익광고를 모두 내보냈다.「교차로」기획발전위원회 송미란씨에게 전화 방문을 통해「우편이용안내」공익광고를 실어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또 필요한 자료는 수시로 보내 주기로 하였다.
올해 그월부터「서울시청뉴스」편집실에도 우편 이용 안내 자료와 함께 우체국 정보를 홍보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서울시청뉴스」편집실에 다시 전화 방문을 통해 홍보 요청을 하니까 4 · 11총선(지자체선거) 때문에 선거기간 동안 「서울시청뉴스」의 발행이 중단되는 상황인데, 4 월에 마침「정보통신의 날」도 있으니 시기를 보아서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또다시 우체국 정보가 담긴 자료를 보내고 전화 방문을 하였다. 4월 10일 이내에 원고 3〜4매 분량으로 자료와 함께 보내달라고 하였다. 평소 국민들에게 홍보하고자 내용을 구상한 것이 원고 7〜8 매였다. 며칠 밤을 새워「서울시청뉴스」편집실에서 요구하는 원고량에 맞추어 나갔다. 또한 원고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 요청이 있어 정보통신부 우정국 운용과의 통계담당자를 찾아 협조 요청을 했다. 지난해에는 1994년도 지환우편물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담당자가 바뀌어 쉽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니 얼마 후 자료가 도착했다. 원고를「서울시청뉴스」편집실에 자료와 함께 보냈다.
며칠 사이 같은 내용을 7매로 정리하여 동아 일보사에 자료와 함께 보냈다. 매년 느끼는 바 이지만 4월 22일「정보통신의 날」에는 기념행사와 아울러 우체국 미담 기사가 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기사외에 국민이면 꼭 알아야 할 우편상식 또는 협조사항이 기사화되기를 간절히 염원해 왔다. 동아일보 4월 17일자 발언대에「보다 빠른 우편을 위하여」라는 제목하에 내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아뿔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대문우체국장이라는 직명과 함께 기사가 나와 버렸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국장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했다. 신문사에 전화하니까 「서대문우체국 장기양」인데 성씨가 장씨이다 보니 국장으로 잘못 알고 기사를 실었다는 것이다. 신문사에 정정 문안을 팩스로 보냈고, 그 이튿날에는 “발언대의 필자 장기양씨는 서대문 우체국장이 아닌 평직원임을 밝혀 드립니다.”라는 정정보도가 독자란 한 모퉁이에 실렸다. 원고 내용은 원하는 바 그대로 잘 실렸다.
「서울시청뉴스」4월 18일자 5면 하단에도 내가 보낸 원고가 실렸다. 공통된 내용은 “규격봉투를 사용하고 받는 사람의 주소와 우편번호는 물론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우편번호를 정확히 사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때 국민들에게 꼭 하고 싶은 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때는 승리하는 순간에 있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처럼 무엇인가 해냈다고 하여 자만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리고 우편제도의 홍보에 관한 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더 열심히 개척해야 할 분야이다. 앞에서 사회적 봉사에 관한 소개도 있었지만 이것 또한 우체국 이미지 개선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나의 홍보전략이 숨어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홍보활동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편업무를 수행하는 정보통신부 산하 전직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병행된다면 그 효과는 훨씬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또한 친절봉사의 질적 향상을 도모 하는 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고객에 대한 친절봉사를 실천하기위하여 업무(창구 · 우편제도에 관한 제반 법규 등) 숙지가 미흡하다고 여겨 새로운 마음으로 창구 업무를 배워 나가고 있다. 우체국 최일선의 봉사자로서 정보통신부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할 것을 새로이 다짐해본다.
1982년초 서울에서 일자리가 없어 서너달 동안 방황하던 때가 생각난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고뇌하는 자식을 안심시키려고 애를 쓰신 어머님의 정성이 온몸에 저리도록 가슴에 와 닿는다. 직장을 구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때의 바람은 어느 관공서의 환경 미화원으로라도 취직하였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일자리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고통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앞집 전화국 직원의 소개로 전화국에서 잠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때 시험을 치러 우체국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을 지키며 건전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작은 소망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희망의 뿌리를 튼튼히 키워 나가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모든 일을 나의 의지대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 계신 팔순 어머님의 보살핌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향에 달려가 어머님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싶다. 일하고 싶은 작은 소망을 성취해 가는 동안 어 머님에 대한 불효는 자꾸 커져만 간다. 언제 철이 들어 자식 구실을 하려는지. 저녁 노을을 아름답게 수놓는 서산의 태양은 자꾸 기울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