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풍속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옛 그림의 ‘풍속화’란 조선시대 풍속화를 가리키며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서민의 생활모습을 농경, 도시, 관아, 세시풍속의 장면에 담아낸 것이다. 풍속화는 조선후기 화단에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더불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후기 풍속화는 몇몇 선비화가들의 선구적 풍속화 제작에 힘입고 17세기 이래 시정의 생활상을 그리는 새로운 시대조류에 맞추어 18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정조(正祖)기에는 화원들에 의한 풍속화 제작이 활발했고 지방에서도 사랑방을 장식할 정도로 저변되었다. 이러한 조선후기 풍속화 번성에는 화가들의 공헌이 있었다. 선비화가들이 풍속화의 단초를 열었고, 화원화가들에 의해 난만한 꽃을 피웠으며, 이들의 회화적 업적을 기반으로 19세기 말까지 다양한 종류의 풍속화가 그려졌다.
윤두서, 풍속화의 씨를 뿌리다
풍속화의 씨를 뿌린 화가로 조선 향촌의 모습을 처음 그려 소개한 선비화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화가들은 새로운 학문이나 외래문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윤두서도 그러한 화가로서, 18세기 조선후기 회화에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魚樵隱公派)의 7대 종손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한 선비로서의 삶을 택해 학문과 서화로서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윤두서의 작품이 실려 있는 중요한 화첩 중의 하나가 <윤씨가보첩(尹氏家寶帖. 보물 481호)>이다. 이 화첩에는 당대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아마도 윤두서는 전원생활을 하며 농촌의 일상을 관찰할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며 또한, 본인이 농업과 산업현장에 관심을 기울였고 가문소유의 농장을 경영하는 입장이었기에 전원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가 탄생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도 1
나물캐는 여인(採艾圖)
<윤씨가보첩(尹氏家寶帖)>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견본수묵 / 30.3 x 25.2cm
보물 481호, 해남 녹우당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 2
짚신삼는 노인(樹下織履圖)
<윤씨가보첩(尹氏家寶帖) >
견본수묵 / 32.5 x 21.5cm
보물 481호, 해남 녹우당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 3
노상풍정(路上風情)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 중 한면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1778년. 견본담채 / 90.9x42.7cm 각폭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 4
씨름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 중 한면 지본담채 / 27x22.7cm 각면
보물 527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 5
월하정인(月下情人)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중 한면 신윤복(申潤福,,1758? ~ 1813 이후)지본채색 / 35.6 x 28.2cm
국보 135호 /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1) ‘나물 캐는 여인’은 비단 바탕에 먹만을 사용하여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산비탈에서 새로 돋은 나물을 캐는 여인네들을 그렸는데 산비탈에 돋아있는 잡목과 풀꽃들은 자연스러운데 반하여, 멀리 보이는 산과 날아가는 새는 어딘지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윤두서가 당시에 유행했던 그림의 참고서인 <고씨화보>의 한 장면을 참조하여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직도 해남종가에 전하고 있고, 남태응(南泰應 1687~1740)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 의하면 윤두서가 이 책을 애용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 그림의 놀라운 점은 남녀유별이 엄연하던 조선시대에 사대부의 남성이 서민계층 여성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이다. 비록 정면은 아니지만 여성이 주인공이 된 풍속화의 사례가 그 이전에 드물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가 깊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짚신 삼는 노인(樹下織履圖. 도2)’ 그림은 노동의 현장성이 돋보이는 풍속화이다. 나무 아래에 인물을 배치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애용된 동아시아 회화의 구도이고 이 전통을 따라 나무 아래에서 짚방석을 깔고 편안히 앉아 짚신을 삼는 노인의 모습을 잘 포착하였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이전의 회화전통과 외래문물을 수용하면서 17세기까지의 그림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주제의식과 제재, 사실적인 화풍으로 풍속화를 변화시켰다. 조선초기부터 제작되어온 정치적 교화용도의 풍속화와 달리 윤두서의 풍속화는 민간에서 선비가 그렸다는 면에서 매우 파격적이다. 물론 이후의 풍속화에 비하여 다채롭지 못하다는 평을 듣긴 하지만 반세기 이상 앞선 시기에 그려졌음을 감안한다면 풍속화의 씨를 뿌린 개척자로 큰 의미를 갖는다.
김홍도-신윤복, 풍속화의 꽃을 피우다
윤두서를 비롯한 조영석 등과 같은 선비화가가 풍속화의 씨를 뿌렸다면,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화원(圖畵署 소속)화가에 의하여 조선후기 풍속화는 비로소 난만하게 꽃을 피웠다. 18세기 중후반기의 풍속화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과 문사관료 및 여항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화원화사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그는 이미 20대에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손꼽혔다. 당시 유명한 감평가였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김홍도를 “조선조 4백 년 만의 놀랄만한 솜씨로 풍속에 더욱 뛰어나 그릴 때마다 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라고 평했다. 실로 서민들의 생업과 휴식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은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가로만 알기에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화가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풍속화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행려풍속도병풍>과 보물 527호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의 ‘씨름’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도3, 도4). 도3의 작품은 ‘행려풍속’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길을 다니며 본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1778년이라는 제작연대가 있고 강세황의 화평(畵評)이 함께 들어 있어서 김홍도 풍속화 중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모두 8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 ‘노상풍정(路上風情)’은 길가다 노상에서 마주친 여인네를 몰래 훔쳐보는 선비를 그린 것으로 선비 체면에 드러내놓고 여자를 쳐다볼 수는 없고 몰래 훔쳐보는 모양새가 웃음을 짓게 한다. ‘파안흥취’ 역시 목화 따는 여인을 훔쳐보는 같은 맥락이다. 너무나 유명한 ‘씨름(도4)’은 무배경에 들배지기로 용을 쓰는 씨름꾼을 중심에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들과 무심한 엿장수를 둥글게 에워싸서 화면에 통일감을 부여하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구경꾼들의 다양한 표정은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하여 준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알려준 화가는 바로 혜원(慧園) 신윤복(申潤福,1758?~1813 이후)이다. 그러나 명성에 비하면 그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빈약하다. 그 빈약한 정보와 흥미로운 그림 때문에 많은 속전이 따르지만,

도 6
연당의 여인
<여속도첩(女俗圖帖)> 중 한면 견본채색 / 29.6x31.4(대) ~ 26.2x19.1(소)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도 7
단오추천(端午 韆)
<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중 한 면김준근(金俊根, 19세기말 활동) 지본채색/31.0x38.7cm(각면) / 개인소장 <<조선시대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참고도판
믿을 만한 것은 거의 드물다. 화원화가라고는 하지만 도화서 화원화가로서 활동했던 공식적인 기록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화가의 역량으로서만 평가한다면 단원 김홍도의 위치에 비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풍속화의 부문에서는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여속도첩(女俗圖帖)>으로 칭해지는 화첩이(도5. 도6) 전하는데 이 화첩도 중요한 그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혜원전신첩>은 모두 30점으로 유흥과 향락을 표현한 그림과 남녀의 춘정적 이미지를 표현한 그림으로 나누어진다. 이 화첩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놀이와 연애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이중 춘정적 이미지를 표현한 그림 중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바로 ‘월하정인(月下情人)’이다. 그림의 내용은 야심한 밤에 남녀의 만남이다. 또한 혜원은 그림에 시를 써놓았는데,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내용이다. 삼경은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이니 통금시간, 즉 둘은 몰래 만나고 있는 셈이다. 당당한 사이이면 몰래 만날 이유가 없겠으니 우리가 모를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겠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유난히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 기녀가 많다. 기방과 유곽을 배경으로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도6)의 ‘연당의 여인’은 <여속도첩>에 속한 그림으로 혜원의 기녀 그림 중 가장 서정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기방 후원연당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기녀의 모습이다. 건물 일부만 표현하고 중앙에 기녀를 넣고 화면 하단엔 탐스럽게 자란 수련을 그린 것이 매우 정취가 있거니와, 스산한 분위기를 잘 전달한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기녀의 표정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필자의 느낌이긴 하지만 기녀들을 향한 혜원의 시선은 따뜻하면서 연민이 어린 듯하다. 김홍도가 서민의 생업장면과 활기를 생생하게 전하여 주었다면, 인간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성(性)과 유흥(遊興)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해준 사람이 바로 신윤복이다.
김준근, 조선의 풍물을 알리는 첨병
단원·혜원과 같은 주류 화원화가들의 풍속화와는 다르지만 주목을 요하는 19세기 말의 풍속화로 개항장에서 활발하게 매매되었던 ‘기산 풍속화’가 있다. 기산은 19세기 말에 활동한 직업화가 김준근(金俊根)을 가리킨다. 기산 개인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는 바가 거의 없고, 그간 작품 자체도 널리 소개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이 국내보다는 외국에 많이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최근 활발한 해외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의 실적에 힘입어 그의 작품의 소장처가 거의 밝혀졌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 라이던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등 구미지역에 15건이 그리고 국내에는 현재 개인소장을 포함하여 6~7점밖에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중 국내 개인소장으로 전해지는 (도7) ‘단오추천(端午 韆)’은 대부분 채색이 없는 무배경의 장면으로 된 그의 풍속화 중 채색이있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귀한 예이다. 기산 풍속화의 의의는 김홍도를 위시한 18~19세기 전반 풍속화가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개항이라는 조선말기의 시대에 부응하여 외국인들을 위한 조선의 전반적인 풍속을 그렸다는 데 있다. 즉 19세기 말 조선의 풍물을 외국에 소개하여 조선을 알린 풍속화인 것이다. 19세기 말의 문화 환경과 생산체제를 반영하고 다양한 주제의 개발과 조선풍속화의 향유층을 국외로까지 확대했다는 면에서 수출화의 순기능적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고 할 수 있다.
풍속화는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풍속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우리 선인들 삶의 모습이다. 오늘날, 오래된 생활문화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풍속화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과 해학이 넘쳤던 선인들 삶의 모습과 문화를 알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하기에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