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이번 달에는 대구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대구에는 좋은 시인들이 참 많은 곳이지요. 작고한 김춘수 시인을 비롯하여 지난 해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문인수 시인, 이성복∙김선굉 시인들이 모두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시인들이랍니다.
그 중에서 이기철 시인은 맑고 결 고운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은그의 대표시는 아니지만 그의 시세계를 잘 드러내는 시라고 할 수 있지요.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막막할 때,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하시는지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술로 가슴 속 울분을 풀거나 뜻이 통하는 허물없는 친구를 만나 속내를 털어놓고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겠지요.드문 예이긴 하겠지만 혹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도 있겠고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상처는 누가 대신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지요. 동물들도 제 상처를 열심히 혀로 핥아 치료합니다. 땅에 넘어졌으면 그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야지요. 전심전력 눈앞의 삶을 살아내야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 속에서 말했지요. 눈앞의 잔은 비워야 한다고. 피한다고 외면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이제 머지않아 꽃들이 다투어 피어날 겁니다. 색색의 꽃들은 아름답습니다. 추위와 모진 바람을 겨우내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몸속의 붉은 상처를 곱게 다스려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냈기 때문에 봄꽃은 더욱 아름답지요.
이기철 시인은 삶이 고달픈 이들을 향해 벚꽃 그늘로 오라고 손짓합니다.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알몸으로 꽃그늘아래 잠시 와서 쉬라 합니다. 벚꽃 아래 벌거벗은 마음은 세상의 명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벚꽃이 만든 꽃자리, 그곳은 세속에 찌든 때를 말끔하게 정화하는 곳이지요. 무겁고 버겁기만 한 오늘과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곳이지요.
시인은 말합니다. 그렇게 며칠 그리움도 서러움도 다 벗어놓고, 알몸으로 꽃자리에 머물다 가라고요. 벚꽃이 만든탯자리에서 새롭게 재생하라고요. 그러면 넉넉하고 싱싱한 신생의 삶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요.
꽃은 아름다움과 청신한 미래를 동시에 선사합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요.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찬란한 삶의 꽃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되돌아볼 일입니다.
흐린 삶이 즐거워지길 원한다면, 맑고 투명하게 빛나길 원한다면 벚꽃 그늘에 앉아 기꺼이 알몸이 되어야겠지요.태중의 아이처럼 깨끗한 영육으로 다시 태어나 사랑과 자유의 화신이 되어 축제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것이 삶의질곡을 건너는 한 방법이 될 겁니다.
돌아보면 삶은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지요. 포기하고 싶을 때, 다 접고 홀연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을때 시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합니다. 다치고 쓰린 가슴을 어루만져줍니다. 욕망에 갇혀 보지 못하던 것을 투명하게 다보여줍니다. 물속의 어름치가 왜 슬프고 아름다운지를, 무심코 길가에 핀 꽃 한 송이가 왜 위대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작고하신 구상 시인은 <우음(偶吟) 2장(章)>에서 삶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 너의 앉은 그 자리가 / 바로 꽃자리니라’
꽃은 산과 들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살아 숨 쉬는 뭇 목숨들이 모두 한 송이 꽃이요, 한 그루 나무입니다. 바쁜 일상에 묶여 꽃구경 한 번 못하는 신세라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꽃, 그것은 곧 그대와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걸음을 멈춰야 하겠네요. 꽃나무들의 옹알이가 한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