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는 웃는다
유홍준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즈음의 내 낙은
홀로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저수지의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긴 한숨을 내뱉어 보는 것이다
알겠다 저수지는
돌을 던져 괴롭혀도 웃는다 일평생 물로 웃기만 한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
‘쓸쓸한 웃음’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세상살이가 여의치 않을 때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울며 웃다 사무치는것이 삶이요 문학일 테니까요. 이번 달에 만나는 유홍준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좋은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오랫동안 제지공장에서 일을 했으나 지난해에 실직하여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을 통해 들었습니다.
언젠가 남미 페루에 갑작스런 이상기온으로 폭설이 내리고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었지요. 거대한 설원 여기저기에 선 채로 얼어 죽은 양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양은 온순하기로 소문난 짐승이지요. 그런 동물이 서로 가까이 다가서면 제 체온이 다른 놈
에게 전달되어 따뜻해지는 꼴을 보기 싫어해서 각각 홀로 서 있다가 동사했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사람 못지않게 짐승도 이기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과일 한쪽도 나눠먹을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지요. 동물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물론 여기에 고개를 내저을 분도 있을 겁니다. 제 먹을 것을 새끼나 동료에게 나눠주는 동물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보다 나은 짐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죠.
시인은‘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갑니다.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저수지,달빛 은은히 비치는 곳입니다.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주위의 돌멩이를 주워 멀리 던져보기도 합니다. 저수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입니다. 시인은 그런 저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길게한숨을 내뱉습니다. 돌을 던져 괴롭혀도 바보처럼 일평생 웃기만 하는 저수지가 못마땅한 것이지요. 여기서 시가 끝났다면 시적 감동은 미미했을 겁니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고 시인은 마지막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저수지는곧 시인이었던 겁니다. 시에 날개가 돋았습니다. 답답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웃습니다. 그 웃음은 외롭고 쓸쓸한 웃음이지만 비루한 인간의 삶을 한 단계 고양시키고, 시인의 몸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줍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대개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언뜻언뜻 드러날 뿐최종 목표 지점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울고 웃으며 가슴에 사무치는 곤곤한 삶의 이력들을 거느리게되는 것이지요. 후련하게 터져 콸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따듯한 긍정, 개안은 인간을 생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우리네 질박한삶입니다. 그러나 저수지처럼 웃는,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전환은 삶의 도약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언제 극한적인 상황과 맞닥트리게될지 모를 현실을 살고 있는 열세 살 소년입니다. 한 기자가 그 소년에게 장래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이렇게 대답합니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살아있는 것입니다.”
내년에도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열세 살 아프리카 소년의 말에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한 동안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았는지요?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잠시 우리들의 옷깃을 스쳐가는 것들이지요. 아무리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 하더라도 여기저기에 선 채로 얼어 죽은 양들처럼 끔찍한 모습을 재현해서는 안 되겠지요. 울며 웃으며 사무치는 삶의 마당에서 소년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