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리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슴에 안고살아갑니다. 그것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않을 뿐이지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지요.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지,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보면 자신만 불행해 지겠지요.
이 시를 쓴 고정희 시인은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하였습니다.생존해 있다면 올해 갑년을 맞이했겠지요. 고정희 시인은 여러 시편에서 생에 대한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에서도 고통과 당당히 맞서 대응하는 강인한 삶의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라고 노래한 시인은‘흔들리며고통에게로 가자’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적극적인 삶의자세는 큰 울림을 줍니다. 고통 앞에서 주저앉아 자탄과 절망으로 일관하는 것은얼마나 불행한 삶인가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남긴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은 파리의 에펠탑을 볼썽사나운 고철덩어리로 보았습니다. 그는 파리 시내 어디에서나 다 보이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다가 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거기서 하루의대부분을 보내곤 했습니다. 레스토랑안에서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아 마음편히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던 거지요. 결국 모파상은 그렇게 싫어하던 에펠탑안으로 들어가 에펠탑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상처와 고통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그것과 하나가 되어 앞으로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게마련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게 마련입니다. 고통과 살 맞대고 간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지요.
불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세의 고통은 다음 생에 받아야 할 것을 이번 생에미리 받는 것이라고. 여기서도 우리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사는 것이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는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피할 필요가 없겠지요.
시인은 비장한 어조로 말합니다.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 영원한 비탄이란없느리라’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눈물과 비탄은끝이 있습니다. 더 이상 떨어져 나갈 것이없을 때 철저하게 벌거벗고 혼자되었을때 깨달음이 찾아오듯 삶의 새로운 빛도그때 찾아옵니다. 바닥까지 가라앉으면다시 물 위로 떠오르듯이 희망의 손을 마주잡기 위해서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아픔이라 할지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음의 기운이 다하면 양의 기운은 어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듯 눈앞의 잔은 반드시 비워야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인간의 소중한 의무이니까요.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마주잡을 손’은멀리있는것이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 손을 잡지못하고 이승의 삶을 마감한 쓸쓸한 목숨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흔들리는 갈대와부평초잎의 이미지를 통해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실 극복의 의지를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시는 종국적으로우리가‘뿌리깊은벌판’에서야함을말합니다. 사람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 한송이 피워 올려야겠지요.
그러나 고통의 현실을 떠나서는 꽃을피울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상처는 아름다운 생의 구근입니다. 머지않아 무안 백련지에, 서울 근교의 봉선사 연밭에 향기로운 연꽃이 다투어 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