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에 대한 사색
김충규
저 일몰이란 것 밤이 되기 전에 보여주는
하늘의 통증 빛깔이다
통증을 참으며 밤의 캄캄함을 견디는 하늘의
살갗에 돋아나는 별은 통증의 열매이다
지상에서 통증 가진 사람만이 피멍 들도록 입술 깨물며
별을 더듬으며 시간의 잔혹을 견뎌낸다
자궁을 막 빠져 나온 신생아는
그 어미의 통증 덩어리인 것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도
이내 눈뜨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쳐다보며
입 속 가득 달콤함의 침이 고인 사람아
그 열매는 나무의 통증인 것
통증으로 쑤시는 생애를 살아온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열매는 피가 굳어버린 멍으로 보인다
어제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20kg의 쌀이었습니다. 시 전문지 <시인시각>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잡지사에서 웬쌀이냐고요? 원고료 대신 보낸 것이랍니다. 잡지 운영이 어렵다 보니 시인들에게정상적으로 원고료를 지급하지 못하고,사례의 뜻으로 대신 쌀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문학지는 대부분 영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잡지가 많이 팔리지 않으니 그럴수밖에요. 몇몇 대형 잡지 외에는 매호 발행하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발행인은 출혈을 감수하고 잡지를 발간합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일이지요.
《통증》은 <시인시각>의 발행인 김충규시인의 작품입니다. 이미 그의 작품은 문단 안팎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깊이 있는사색과 예민한 감각이 어우러진 그의 시에는 생에 대한 뜨거운 육성이 살아 있습니다. 어떤 시를 보더라도 진정성과 치열한 성찰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저무는 서녘 하늘의 노을을 보면서‘통증’을 발견합니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시인은연민 어린 눈길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목숨 지닌 생물들 중 가엾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 고단한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가고 있지요. ‘통증을 참으며 밤의 캄캄함을 견디는 하늘’을 시인의 예리한 눈길이 놓칠 리가 없습니다. 통증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견디는 하늘의 살갗에 돋아나는 별을 시인은 ‘통증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놀랍습니다. 별을 보고 통증의 열매를 말할 수 있는 시인은 흔치 않습니다. 고통을 이기는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감내하는 것. 피한다고, 눈 감는다고 될일이 아니지요. 이것을 누구보다도 힘든삶의 역정을 견뎌온 시인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통증 가진 사람만이 피멍 들도록 입술 깨물며 / 별을 더듬으며 시간의잔혹을 견뎌낸다’
피멍 들도록 입술을 깨물며 견디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힘들고 아픈 기억을 가진 분이라면 이 시구에 크게 공감하실 겁니다. 이 시간‘별을 더듬으며 시간의 잔혹’을 견디고 계신 분도 있을 겁니다. 고통의 빛나는 열매를 바라보는 한 잔혹한시간은 머잖아 끝이 보이겠지요.
어미가 겪어낸 통증의 열매가 힘찬 울음을 터트립니다. 통증 덩어리는 곧 반짝이는 별이요 풋풋한 신생의 어린 싹입니다. 나무의 열매도 예외가 아니지요. ‘통증으로 쑤시는 생애를 살아온 또 다른 사람에게’그 열매는 단순한 과실이 아닙니다. 뜨거운 피가 굳어버린 시퍼런 멍이지요.
돌아보면 상처 아닌 세월이 없습니다.통증의 순간, 순간을 견디며 참 용하게 예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단한시인의 삶이 있었기에 이처럼 빛나는 시가 나올 수 있었겠지요. 김충규 시인의《나는 언제나 고양이를기다린다》라는 시를 보면 한때 그의 절망이 얼마나 극렬하고 참담했는지 조금은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객혈을 하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 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속의 나를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아마 이런 고통과 절망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충규 시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통증》과 같이 뛰어난 시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구요.
시인이 이메일로 답신을 보냈습니다.몸이 안 좋아 잡지 제작을 외주에 맡긴 사이 몇 군데 문제가 생겼다며 새로 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배포가 끝난 상태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시인은 자신이 만든 잡지에 티끌만한 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시만큼 아름답고 개결하여모처럼 흐뭇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