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뒤뜰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감나무가 시인의 몸속으로 들어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감나무는 세상 풍파에 의연히 맞서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내 같기도 하고, 조용히 내면의 길을 걷고 있는 수도승 같기도 합니다. 순탄한 삶은 아니었겠지요. 육신은 많이 늙어 보이고, 하늘 향해 걸으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았는지 가지는 굽이굽이 구절양장입니다. 벌건 황토처럼 속이 다 타버렸다고 한숨짓던 고창의 어느 촌부 같기도합니다.
‘멈칫멈칫 구불구불’생은 이어지고, 태양에 대한 사유는 치열합니다. 태양은 광명, 역동성, 생명의 근원, 영원성 등을 상징하지요. 온몸이 부르트도록 거친 삶의 격랑과 맞서 싸우며 사유의 깊이를 더해 갑니다. 빛과 생명에 대한 탐구는 살아있는 한 멈출수 없는 생의 무거운 과제이기도 합니다.
감나무의 푸른 열매는 떫고 단단합니다. 익지 않은 생각, 아직 숙성의 문턱에 발 딛지 못한 치기 어린사고들이지요. 시인은 가차 없이 제대로 여물지 않은 생각들을 버립니다. 어쭙잖은 생각으로 눈앞의 현실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허튼 말 내지 않기 위해 노오란 감꽃을 떨치고, 땡감 같은 생각들을 단호하게 떼어 버립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꽃 줍던 추억들을 갖고 계신지요? 목걸이를 만들어 주렁주렁 목에 걸고 다니던 기억들이 새롭습니다. 나무 아래서 칙칙하게 썩어가던 땡감의 모습도 아련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감나무의 몸부림, 아픈 이력들이지요.
생의 길이 아니다 싶으면 툭 분질러 버리는 감나무 가지, 새들은 그것을 보고 미련을 떨치는 법을 배우는군요. 늦가을 비로소 감나무 머리위에서 빛나는‘밝은열매들’은 지치고 늙은 육신이 만들어낸 빛나는 생의 결실이지요.
감나무는 그 예쁜 열매에 오래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랑도 하지 않지요. 겨울바람이 몰아치면 말없이알몸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묵묵부답 동안거에 듭니다. 동안거를 통해서 감나무는 또 다른 열매들을가슴에달겠지요.
강화도 동막리에서 버려진 농가를 개조하여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보증금 없이 10만 원짜리 폐가에둥지를 틀고 사는 시인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88년 <세계의 문학>에《성선설》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가난한 시인의 삶을 어렵게 꾸려가면서도 궁핍에 주눅 들지 않고 따뜻한 서정을 바탕으로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삶의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집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시인은 세속의 족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갑니다. 안채의 빨간양철지붕을 자금성(紫禁城), 행랑채의 파란 양철 지붕은 청와대, 흰 슬레이트를 얹은 화장실을 백악관이라며 자랑한다는 시인은 이시대의 논리로 보면 무능력한 극빈층의 한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시인은 부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고 있는 꿈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갑니다.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은자(隱者)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함민복 시인을“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고 했다지요. 그렇습니다. 시인은‘밝은 열매들’을 가슴에 달고 있습니다. 가난과 불우의 협곡을 지나온 자 만이 생의 빛나는 열매를 지닐수 있는 것이겠지요.
소형버스를 타고 가족과 함께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떠도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획일화된 삶의 방식을 거부할 때 고통과 외로움이 달려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진실은 온몸으로 그것을 통과한 자만이만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낯선 길로 나서는 순간 한 그루의 감나무가 손을 들어 반겨 주리라 믿으며 다시 짐을 챙깁니다. 어느덧 다시, 가을입니다. ![](/upload/logo_r[670][89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