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고 걸으면서 나는 어떤 사람을 생각했다.
얼마나 깊고 깊은 마음이 있었기에 이 많은 눈이 내렸는지,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을 생각했다. 뒤라스의 <연인>에서처럼, 마치 강물의 레몬 빛을 온몸으로 받은채 세상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듯했던 그 사람. 빨간 가방을 메고, 갈래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던 그 사람….
고교 시절, 서울의 M대학교 백일장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깊은 심호흡을 한 뒤, 기억 자루의 주둥이를 넓게 벌리고 바닥까지 손으로 싹싹 긁어 보아도 내 손에 잡히는 단어는 언제나 그 사람에 대한 흔적뿐이었다. ‘빨간 가방을 멘 갈래머리 소녀’.
그 사람은 당시 백일장 장원을 했으며, 의례대로 작품 낭독과 더불어 소감을 발표했다. “노란 꽃 피거든 앞산에 옮겨 심겠습니다. 멍든 꽃 줍거든 내 가슴에 심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나를 조금 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수상 소감으로 남긴 이 한마디.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떠내려 온 아기 같은 모습의 그 사람이 남긴 이 한마디는 강한 메타포가 되어 우표를 붙이지도 않은, 소인도 찍히지 않은 한 장의 엽서로 내 가슴에 수신되었다.
그 날 이후, 그 사람은 까맣게 타들어간 내 마음에 폭설이 되어 쌓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말로 축하 인사를나눴을 뿐인데, 그 외에는 그 어떤 무엇도 없었던 그 사람이었는데, 내 안에 들어온 그 사람은 어느 새 나와 입을맞추고 나의 아내가 되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았던 것도 같다. 긴 시간의 부스러기로 만들어진 그 한 줌의 날에스스로 황홀해 하며 그렇게 수년을 보냈다. 어느 해인가는 내 책상 위에서 장미가 까맣게 타들어가기도 했고, 어느 해인가는 다시 하얀 재가 되기도 했다.
꽃잎을 삼킨 봄날이 열 번도 넘게 지나갔다. 삶이 나를 조금 덜 사랑하길 바란다고 말한 그 사람은 어쩌면 한아이의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를 테지만, 여전히 지금도 나타나고 싶은 대로 나타나는 그 사람은 아름답기를 원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 가끔은 꽃은 없고 꽃을 보았던 나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도 다시 나의 꽃이되기도 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면 언제고 다시 한 번은 만나지겠지.’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로 인해 피곤은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은 시간이 되었다. 불현듯 뒤를 돌아본다. 나의 맨 뒷장을 몰래 찢어간 흔적이 보인다. 이런, 누구지? 비가 오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다만 얼룩처럼 남은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를 슬그머니 불러본다. “내 마음을 외상으로 가져간 사람, 그래요. 외상값은 받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