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대학 다닐 때 학교 앞에 자주 가는 분식집이 있었다. 「행복분식」이라는 이름의 분식집을 운영하는 분은 연세가 지긋하신 아주머니 두 분이었다. 자매간인 두 분은 손님들을 어찌나 살갑게 대해주시는지 꼭 고향집의 어머니를 뵙는 듯했다.
학교 앞에 있는 터라 분식집 단골은 대부분 나 같은 학생들이었다. 시골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의 주머니는 항상 헐거웠다. 나 역시 가난한 고학생 중의 하나인 탓에 분식집을 어지간히도 드나들었다. 당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시골집 형편이 힘들 때라 생활비는 늘 쪼들렸고 급기야 고향집에서 부쳐오던 소액의 생활비마저 끊기고 말았다. 때마다 염치없이 분식집을 찾곤 했는데, 문제는 라면 한 그릇 사먹기가 여의치 않다는 데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약간의 돈을 벌긴 했지만 책을 사거나 방세를 내기도빠듯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생고를 해결하지 않고 어찌 일을할 수 있겠는가.
외상장부에 나날이 숫자를 더해가는 외상값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 두분께선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소라도 잡아먹을 나이인데 굶고 어찌 힘을 쓰겠느냐? ”고 하면서 계란까지 넣고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셨다.
「행복분식」의 남다른 점은 두 아주머니의 푸짐한 인심에 있었다. 분식집 한켠엔 커다란 밥통이 두 개나 있었는데 밥통 안에 든 밥은 공짜였다.그 집에 들어온 손님이라면, 라면 한 그릇을 먹거나 떡볶이를 먹거나 상관없이 누구든 원하는 양만큼 밥을 퍼서 먹으면 그만이었다. 분식집의 손님치고 밥통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학교 앞에서 십 년도 넘게 장사를 해온 아주머니들은 처음엔 배가 고픈 학생손님들에게 밥 한 그릇을 서비스로 주곤 하셨다고 한다.그러다 아예 밥통 째 내놓게 되었는데, 이는 곧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양껏 배를 채우라는 두 분의 뜻인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행복분식」의불은꺼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다 빈속을 채우거나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다가도 출출한 배를라면 한 그릇에 밥 두 그릇으로 채웠던 적이 비일비재하다.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조차도 잊고 있던 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생일을 챙겨주신 적도 여러 번이다. 외상장부의 이름 옆에 생일을 적어놓으라 하곤 잊지 않고 그 많은 학생들의 생일을 챙겨주셨던 아주머니들이었다. 물론 이 역시 공짜, 정성으로 끓여 내신 생일상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미역국에 섞지 않은 단골들이 없었을 것이다.
가끔 출출할 때 라면을 끓이노라면「행복분식」아주머니들이 생각난다. 혹시라도 배를 곯은 학생들이 찾아올까봐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던, 내 집처럼 편했던 그 곳!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은「행복분식」의 라면 한 그릇과 밥 두 공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