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예작도·당사도·노화도를 기행(紀行)에 담고 6월 6일 오후 청산도(靑山島)에 왔다. 경일장에 여장
을 풀고 곧바로 섬 탐방에 나선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 바다와 뙈기논이 맞선 보는 도락리마을, 앞개 해변의 정경에 취한 채, 서산에 머문 석양을 좇다가 해거름을 만난다. 장엄한 불덩어리는 구름 뒤에 숨고 노을이 낙조를 대역한다. 청산의 밤은 깊어가고 등대마저 시리도록 고적하다.
2007년 6월 7일
청산도 기행 중에‘섬은 영원한 청춘이다’는 짙은 인상을 받는다. 오늘 오후엔 다른 섬에 가야 한다. 시간을 아껴 더 많은 곳을 관광할 속셈으로 아침 일찍부터 한나절 택시를 대절했다. 기사는 험난한 곳까지 친절히 안내한다.
KBS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 범바위, 전망대, 장기미해변, 청계리사장터, 고인돌을 답사하고 신흥리 해수욕장에 왔다. 경관이 수려하고 원근의 섬들이 그림 같다.
묵직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홀로 고즈넉한 해안을 걷는다. 악어처럼 얽고 폭우를 만난 밭이랑처럼 움푹움푹 패여 오만형상으로 조각된 해안 암반이 경이롭다. 점입가경인가. 1킬로미터 전방에 작지만 신비스런 무인도가 나타난다. 지도에서 본 목섬이다. 주변 바다에서 해녀들이 숨을 몰아쉬는 휘파람소리가 한이 서린 비파 음으로 들린다. 때마침 썰물로 바닷길이 드러나 천혜의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목섬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설렌다. 벅찬 흥분을 안고 10여분 그 곳을 향하여 걷다가 해안 길이 바닷물에 끊겨 건널 수 없다. 목전에 원고지를 까맣게 채워줄 미지의 섬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부지용(匹夫之勇)의 자만일까. 완만하게 보이는 암벽을 타고 올라가 산길로 돌아서 내려오면 될 것 같아 조심조심 바위벽을 기어오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암벽을 거의 다 올라갈 무렵 발을 잘못 디뎌 몸은 암벽 아래로 굴렀다.
2번, 3번 뒹굴 때만 해도 무엇이라도 잡고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위 틈새라도 잡아보려고 갖은애를 쏟았지만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안돼, 안돼, 더구르면죽어. 낭떠러지야, 멈춰야돼.”소리쳤지만 내 몸체는 속수무책으로 계속 굴러 내려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죽으면 안 돼요. 할 일이 남았어요.”애걸하는 비명이 허공을 가른다. 순간 가족들의 얼굴이 번개처럼 스친다.
혼미한 상태에서 내 몸은 8번 쯤 굴렀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나무에 받혀 멈췄다. 바로 저승길 입구다. 꿈인가 생시인가 나를 받쳐준 그 나무 바로 아래 바닥은 30여 미터 낭떠러지 암반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모골이 송연하다. 이런 암벽 끝자리에 나무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무야, 고맙다. 죽음의 질곡에서 너는 내 생명을 건졌다. 무엇으로 너의 은혜를 갚을까. 물 한 방울도 얻어먹기 어려운 바위틈에서 나를 살리려고 북풍한설 모진 인고를 견디며 이 벼랑 끝을 지키고 있었구나.’
감사기도가 봇물처럼 터지고 내 안의 교만과 위선을 눈물로 회개한다. 주여, 감사합니다. 은혜와 감사가 찬송으로 이어진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정신을 가다듬고 내 몰골을 보니 옷은 군데군데 찢기고 온몸이 피멍들고 카메라, 안경, 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몸은 무겁지만 통증은 미미하다. 이곳에 더 머물면 나무마저 밀려날 것 같아 겁난다. 좌고우면, 살얼음 딛듯 간난신고 끝에 이곳을 겨우 빠져나와 내가 떨어질 뻔했던 해안으로 내려왔다. 간담이 써늘하다. 이곳 암반 바닥에 카메라는 떨어져 박살났고 위에는 30여 미터 낭떠러지 높이의 끝자리 바위틈에 내 생명을 지켜준 그 나무가 아슬아슬하게 벼랑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살아있는 것이 꿈만같다. 분명 기적이다. 나 같이 부덕한 사람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신의 은산덕해(恩山德海)일까.
이 날 밤 11시, 어렵게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병원에서 갈비뼈 골절의 진단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 교도소재소자와의 상담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더욱 감사한 것은 얼굴과 머리는 전혀 상처가 없으니 이 또한 기적이 아닌가.
7 6 7, 이 날의 기적은 내 인생 제2의 탄생이다. 계기는 변화의 기회다. 이 기적이 시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생의 이정표를 암시하는 계기로 여겨진다. 남은 인생, 성취를 비우고 봉사로 거듭나라는 계시가 아닐까. 내 인생의 그림을 수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