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선택일까 필수일까
지난 4월, 32명을 살해한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 난사 사건은 세인의 가슴에 폭풍을 안겨준 희대(稀代)의 참극이었다. 살해범 조승희, 그는 한국인이었고 우리는 경악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으로 말문이 막혔다. 애도의 날, 33개의 추모석이 설치되었다. 가해자인 조승희의 추모석도 마련된 것이다. 성조기와 교기, 장미·안개꽃과 함께‘2007년 4월 16일 조승희’라는 메모가 붙었다. 그를‘희생자’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와 적개심 속에서도 대승적 차원에서 그들의 용서는 빙판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였다. 그 추모석에는 “네가 도움과 위로를 얻지 못하고 우리가 네 친구가 되어주지 못
해 미안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추모사 중에는“한국인은 너무 미안하게 생각 마시오. 이민을 잘 못 관리한 미국인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했다. 그들은 조씨를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로 인식했고,“ 그의 가족을 감싸줘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는 우리의 용서문화를 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
생활 속에 미움의 응어리를 가슴에 묻고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도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당신과 나, 크고 작은 일에 미움과 노여움을 만날 때, 용서로 아픈 심신을 치료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대인관계에서 미움이나 원망을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보통사람들이다. 나를 배신한 연인이나 동료, 나를 해고시키고 승진에서 탈락케 한 주역, 나를 왕따 시킨 사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증오를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권세의 그늘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나를 핍박하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들은 또 어찌하란 말인가. 보수·진보·지연(地緣)은 그들끼리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되어 서로 헐뜯고 싸우다가 분을 삭이지 못해 가슴이 퍼렇게 멍든 채, 국민과 국가를 운운하는 모습이 보통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조직체 내에서도 개인 간, 단체 간에 갈등을 빚고 서로가 서로를 가해자로 내몰고 용서에는 인색한 모습을 자주 만난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원수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
나부터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을 내 좁은 가슴 속 감옥에 가두고 증오의 불을 지피다가 내 가슴만 검게 그을린 일이 한두번인가. 미움과 분노를 품는 자체는 상대에게 보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되지 못하고 내 안에서 화(禍)를 키우는 독소일 뿐이다.
반구제기(反求諸己)
교수들이 선정한 2007년도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사자성어다. 잘못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원인을 자기에서 찾아 고친다는 뜻이다.
내 속내를 거울로 들여다본다. 남을 용서하는 데는 좁쌀이고, 남에게 용서를 구하는 데는 밴댕이 소갈머리다. 남의 허물에는 편협하고 내 허물에는 관대함이 부끄럽다.
최근 영국 스미스대학의 잭슨 박사팀은“적개심을 품고 있으면 폐활량에 해롭고 관상동맥 질환과 고혈압 발병에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분(憤)을 삭히는 데는 세월만이 약이 아니다. 용서가 더 명약이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일 때, ‘상대방이 틀렸다기보다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대화하면 용서는 자연스럽지 않을까.
용서하는 것은 자존심을 잃는 것이 아니라 겸손이고 용기다.
사람이 죽을 때, 누구나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생전에 용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더불어사는우리,‘ 나’를‘우리’로 주어를 바꿔‘용서’의 현주소를 점검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가. 누가 나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 잣대로만 상대를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육안에 가렸던 혜안을 틔어 미움 자리에 호감을 심어보자.
용서는 감성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생활인의 위대한 지혜다. 이제부터‘용서’라는 선택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전환하여 새 학기부터는 좀 더 성숙한 편안함을 얻어야겠다.
아름다운 용서는 아름다운 인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