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는 11월의 카타르시스다.
으스스 비바람이 몰아치는 11월의 어느 날, 폐렴으로 삶을 포기한 채 창 밖에 하나 둘 떨어지는 담쟁이 잎사귀를 처연히 바라보고 열, 아홉, 여덟…, 역으로 숫자를 헤아리며 오늘 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는 화가 지망생인 어린 처녀 존시. 40년 넘게 걸작을 꿈꾸지만 아직도 싸구려 간판이나 그리며 근근이 먹고살아가는 늙은 화가 버만.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쳤는데도 담쟁이의 마지막 잎사귀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생명을 포기하려던 존시는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버만 노인이 밤새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남몰래 혼신을 다하여 그려 매단 것이다. 이 힘겨운 작업으로 노인 버만은 40년 만에 <마지막 잎새>라는 걸작을 낳지만 폐렴에 걸려 죽게 되고, 젊은 존 시는 생명을 잇는다.
삭막한 11월, 이들이 남긴 삶과 죽음은 모두가 아름다운 승자다. 나는 11월이 오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읽으며 삶과 죽음의 숭고한 가치를 되새기고 진한 카타르시스를 만난다.
11월은 여유의 미학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파란 하늘에 떠도는 하얀 뭉게구름처럼, 11월은 넉넉하고 남음이 있다.
어쩌면 만만디(漫漫的)의 미학인지도 모른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오솔길은 안으로 숨 쉬고 침묵으로 대화하는 여유이기도 하다. 11월은 봄처럼 새싹을 틔우거나 대지를 꽃으로 장식할 의무도 없다. 여름처럼 두꺼운 옷을 껴입고 땀 흘릴 필요도 없다.
10월의 단풍에 미혹되어 설렌 가슴으로 군중 속에 갇히지도 않는다.
12월처럼 망년회다, 송년회다로 애꿎은 술만 축내며 몸이 망가질 염려도 없고 한 해를 결산하거나 연하장을 보낼 발걸음도 아니다. 매사가 빨리 빨리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오늘날, 그나마 11월이 있어 숨을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파스칼은“인간의 모든 불행은 조용한 공간에서 고요하게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했다. 일 년 내내 여유를 묻고 사는 현대인들, 아직도 캘린더에 남아서 한 해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는 12월을 핑계 삼아 색깔 없는 11월만이라도 여유를 만끽하며 느릿하게 사색에 젖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을 쌓아 놓고 밤새 삼매경에 빠져보고 그리운 사람에게 엽서라도 한 장 띄워 메마른 가슴을 적셔보면 어떨까.
화려한 주연보다 조용한 조연으로 머무는 11월은 여유의 미학이다.
11월은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11월은 자신을 포장하거나 화장하지 않는다. 잎사귀가 다 떨어지면 감춰진 나무 등허리를 드러낸 채 비우고 살아간다. 푸른 옷도 붉은 옷도 걸치지 않고, 하얀 물감으로 자신의 흉터를 색칠하지도 않는다. 화려했던 꽃이 지고 난 뒤 말라비틀어진 몰골, 그렇게도 순결하던 하얀 눈이 녹고 난 자리의 추한 모습이 싫어서일까. 한때는 파랑, 노랑, 붉은 색깔로 멋도 부렸지만 다 부질 없는 것임을 11월은 일찍 깨우친 철인(哲人)일까. 나는 11월의 앞에 서면 작아지는 느낌이다. 비운다 하면서 생각만 앞세우고 탐만 무성하기 때문이다.
내 능력보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고, 실체보다 더 크게 보이고, 더 많이 성취하고 싶다. 여름처럼 푸르고, 가을처럼 꾸미고 싶다. 그러면서도 나의 약점이나 흠집은 하얀 눈으로 감추고 싶다. 그래서일까. 탐을 안으로 곰삭히고 무욕대안(無慾大安)의 넉넉한 품을 닮아보려고 11월을 예찬하고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고혹(蠱惑)한 끼도, 화려한 꾸밈도 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하면서 여유와 사색을 마시며 겨우 30일을 사는 11월의 단명이 아쉽다. 단 하루라도 11월의 생명을 늘려줄 버만 같은 화가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