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외갓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나는‘외숙모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누룽지탕이 생각난다. 외숙모님께서는 늦은 저녁이면 이불속에서 꾸물거리는 우리 자매에게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누룽지탕을 가져다 주셨다. 그것은 간식거리가 부족한 시골에서 별 부담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좋은 요깃거리이자 보약인 셈이었다.
우리 집은 칠남매였다. 그것도 가난해서 먹을 것이 부족한 집의 칠남매였다. 그 중에서 외갓집에서 함께 자란 나와 언니는 셋째와 넷째 딸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천덕꾸러기가 되기에 딱 좋은 순서였다.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에 아이 일곱을 거둬 먹일 엄두를 내지 못하셨다. 결국 나와 언니가 형편이 좋은 외갓집에서 자라는 걸로 결론이 나면서 우리 자매는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6년을 외갓집에서 자랐다. 거대한 기와집에 한약방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외갓집은 어려운 형편의 우리 집에 비하여 너무나 풍족한 살림살이였다. 1960년대의 그 어려운 시기에도 보리쌀이 섞이지 않은 쌀밥만을 먹을 정도였으니 우리 둘 정도의 입 보탬은 별 타격도 없는 집이었다. 거기에다가 어머니는 외갓집의 고명딸이었다. 그것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외숙모님은 6남매를 키우셨다. 딸 셋에 아들 셋. 살림살이 걱정 없이, 부엌일을 거드는 아이와 농사를 거들 일꾼 둘을 거느린 부잣집 마나님인 셈이었다. 친정도 상당한 부호였기에 고생을 모르고 살아오셨던 외숙모님께 시누이의 아이였던 나와 언니는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마 내가 외숙모님과 같은 형편이라면 나는 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시누이의 아이들에 대한 미움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외숙모님은 그러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어떻게든 나와 언니를 배려하며 거두었고, 우리는 그런 외숙모님 덕분에 기죽지 않고 외갓집에서 천방지축으로 자랄 수 있었다.
봄이면 오얏과 앵두를 따서 방안으로 들여놓아 주시던 분. 여름이면 우물에 넣어두었던 수박을 쪼개어 속 부분만을 우리에게 주셨던 분. 가을이면 아직은 파란 감을 미리 삭혀 먹이셨고, 겨울이며 고염을 설탕으로 재웠다가 긴 밤을 지낼 수 있게 가져다 주셨던 나의 외숙모님.
그래서 나는 외갓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보다 외숙모님이 먼저 생각난다.
이제는 여든이 넘어 외삼촌도 계시지 않은 외갓집을 힘겹게 지키고 계신 외숙모님은 가끔씩 말씀하신다. 그 많은 대식구도 모자라 우리 자매까지 있던 그 시절이 가장 활기찬 생활이었다고. 그리고 그 시절이 다시 한 번만 온다면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싶다고.
내가 사랑하는 외숙모님이 모쪼록 건강하게 외갓집을 오래오래 지켜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한 오늘이다. 내일은 맛있는 누룽지탕을 만들어 외숙모님을 뵈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