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그 아이는 방학이 되어야 볼 수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머리카락이 유난히 까매서 귀공자 같던 아이가 오는 날이면 유자나무가 많은 그 집은 유난히 더 환해 보였다. 그 아이가 오는 날 나는 괜히 샘물에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마음은 벌써 그 집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서성였지만 나는 선뜻 사립문을 나서지 못하고 애꿎은 봉숭아 이파리만 뜯어내고 있었다. 앙증맞은 채송화 꽃잎을 하나둘 헤아리고 있었지만 내 귀는 사립문 쪽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먼저 가 닿곤 했다.
그 아이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내 등 뒤에 와 서있다는 건 봉숭아꽃에 일렁이는 그림자로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꽃잎이 화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내가 봉숭아꽃을 손으로 툭 건드려버린 탓이었다. “ 야! 너 언제 왔냐?”나는 아이의 존재를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떼며물었다. “ 잘 지냈니?”아이는 내 표정에 곧잘 속아주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맘에 들어 “우리 잠자리 잡으러 가자. 잉?”하며 앞장을 섰고 아이는 대꾸도 없이 내 뒤를 따라오곤 했다.
저수지에는 잠자리가 많았다. 잠자리 말고도 여치, 방아깨비, 메뚜기 등이 풀썩 풀썩 뛰어오르는 저수지는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곤충을 쫓아다니다가 힘들면 경사진 풀밭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저수지 둑 밑에로는 물길이 있었다. 더위에 지치면 신발을 벗어놓고 둑에서 물장난을 쳤다.
저수지물 이주 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산 그림자 가물 속에 잠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저수지를 빠져나왔다. “ 내일은 개구리 잡으러 가자아~”아이는 하얀 손을 흔들며 유자나무 사이로 사라졌고 나는 우리 집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사립문을 발로 걷어찬 후 샘가로 달려가 샘물에 얼굴을 비쳐보았다. 아이와 놀고 온 날이면 나는 온 들판을 뛰어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내 유년의 보석 같은 날들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막을 내렸다. 그 아이의 외갓집이었던 유자나무가 많은 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의 외갓집 식구들이 도회지로 이사를 간 후 방학이 와도 아이는 내려오지 않았다. 아이가 내려오지 않던 여름방학 내내 나는 토란잎에 궁구는 빗방울을 보며 그 아이를 생각하곤 했다.
그 아이에 비해 사내처럼 씩씩했던 나는 그 아이의 하얀 얼굴이 좋았고, 길고 가느다란 손이 좋았으며, 아이 가방 속에 들어있던 알록달록한 동화책들이 좋았다. 비가 오던 여름날, 토란잎을 꺾어 우산처럼 쓰고 감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그림은 참 오래도록 가슴속에 잔잔하게 머물러 있다. 그 아이도 유년의 뜰에 그려놓은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볼 때가 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마흔 고개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그 아이는 여전히 내게 소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