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아득히 먼 유년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리면 옹기종기 살아가던 이웃들의 정담이 퐁퐁 샘솟는 듯합니다.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다섯 가구가 모여 살던 그 집 마당엔 아담한 우물이 하나 있었지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다섯 가구 정다운 사람들의 얼굴을. 충청도 출신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와 우리 엄마처럼 남편을 일찍 여의고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과 단칸방에서 살던 평택아줌마네, 부인과 이혼한 뒤 노모를 모시고 아이들과 어렵게 살던 목수 장 씨 아저씨, 먼 전라도 신안에서 귀경해 두 동생을 데리고 억척스럽게 살던 순이 언니네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삯바느질로 키우느라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박혀있던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집.
어느 해 여름의 일입니다. 신안에서 올라온 순이 언니네가 하루 내내 우물가에 나오지 않고 있었지요. 더구나 끼니 무렵이면 경쟁처럼 들려오던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도 멎었고요. 주야 교대로 공장에서 일하느라 낯빛이 박꽃처럼 하얗던 순이 언니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느껴지던 그 며칠이었어요.
그 날 저녁, 엄마는 가만히 쌀통을 열어 양은그릇에 쌀을 소복이 덜어내 제게 들려주며 순이 언니네 부엌에 놓고 오라고 하셨지요. 우리 집 쌀통도 곧 바닥이 드러날 형편이건만 어린 마음에도 냉큼 이유를 묻지 않은 건 엄마의 깊은 뜻이 우물 속처럼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이 언니네 집에 관심을 보인 건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주인집에선 김치를, 평택아줌마네는 밑반찬을 좁은 부엌에 살그머니 놓고 갔고, 목수 장 씨 아저씨는 밀가루 한 포대를 두고 갔다고 이튿날 다시 우물에 나온 순이 언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 고맙다는 인사를 수차례나 했거든요. 당시 순이 언니네 아버지께서 몹시 아프셔서 몇 달치 월급을 가불해 시골에 보내드리고 쌀이랑 생활비가 떨어져 몹시 힘든 처지였대요. 당사자인 순이 언니가 아무런 말을 안 했는데도 엄마들은 이미 순이 언니네 형편을 눈치 채고 있던 거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정들었던 이웃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그 집을 떠날 때마다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며 시루에 떡을 쪄 집집마다 돌려먹던 기억, 어쩌다 별식이라도 하는 날엔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이웃과 나눠먹던 훈훈한 기억들이 어디 한둘일까요? 한 식구처럼 정이 들어 그랬는지 그 집을 떠나오던 날, 목 놓아 울던 기억도 납니다.
육중한 아파트 현관문 뒤에 숨어서 관심조차 간섭으로 여기고 사는 요즘의 이웃들을 볼 때마다 우물이 있던 그 집 뜰이 그리워집니다. 다른 네 가구의 가족들도 저처럼 정이 퐁퐁 샘솟던 그 집 뜰의 우물을 그리워하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