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지난 봄, 목욕 봉사가 있는 날이었다. 대상은 교회 인근에 사는 독거노인들이셨는데, 외할머니와의 정이 남다른 나는 매번 목욕 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곤 했다. 어릴 때 몸이 약한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던 터라 할머니들만 뵈면 외할머니 생각이 나고 무작정 정이 가는 이유다.
한 신도께서 운영하는 목욕탕을 매번 무료로 빌려주시니 이보다 고마울 데가 있으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할머니들을 여러 대의 차에 모신 후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 할머니께서 차에 오르기 전 살며시 내게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들 내외가 이혼 후 집을 나간 뒤 어린 두 손녀를 데리고 근근이 사는 할머니셨는데, 손녀들도 데리고 가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날이 아직 추운데 목욕탕도 없고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목욕을 시킨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말씀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할머니들 중에는 몸이 불편하셔서 혼자 힘으론 목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이 많았다. 등도 밀어드리고 머리까지 감겨드린 후 틈틈이 배운 지압을 해드리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들을 뵈며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목욕탕 구석에 아까부터 웅크리고만 앉아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어른들뿐인데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낯설어 그런지 선뜻 몸을 씻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 쪽으로 다가가 “아줌마가 등 밀어줄까?”했더니, 아이들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오랜 만에 목욕을 하는 형편이니 부끄럽게 드러난 지난겨울의 흔적들이 어린 마음에도 부끄러웠으리라.
아이들의 경계심부터 풀어줘야 친해질 수 있겠단 생각에 내 어릴 적 이야기들을 해줬다. 아줌마도 어릴 때 할머니랑 살았는데 시골이고 수도도 없어서 명절이나 되어야 목욕을 했다고, 그래서 까마귀가 사촌하자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그 말에 아이들은“정말요?”하면서 킬킬대느라 여념이 없다. 과거의 나에 비하면 그래도 자신들은 행복한 거라고,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는 것만 같았다.
목욕탕에 들어설 때까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던 아이들이었는데 그새 긴장이 풀렸나보다. 참새처럼 재잘대며 곧잘 농담까지 건네는 걸 보니 아이들은 비단 몸만 씻은 게 아니라 마음에 채워둔 자물쇠까지 연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 몇 차례 아이들과의 목욕탕 데이트가 이어졌는데,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아이들 성격도 밝아지고 얼마나 깔끔을 떠는지 모르겠다.”하신다. 요사이 여름이라 아이들 만난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그 목욕탕을 떠올릴 때마다 햇살 한 줄기가 가슴에 들어차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