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신혼 초, 우리 부부는 아주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다.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으로 갈라진 담벼락을 담쟁이넝쿨이 지탱하고 선 열세 평 정도의 좁은 집이었지만 유독 그 아파트에 정이 갔다.
현관을 면한 이웃엔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와 두 딸이 살았는데 나는 곧 자매와 친해졌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집안의 소소한 대화가 오갔고, 어쩌다 별식이라도 하는 날엔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양쪽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눠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어느 날, 중학생인 둘째 정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면담을 요청했다. 정아의 말인즉, 내일 언니가 수학여행을 가는데 마침 아빠가 지방에 가셔서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날 저녁, 김밥거리를 사서 아침 일찍 쌀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놓고 언니인 진아를 불렀다. 수학여행 경비는 언니가 빌려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여행에 다녀오라고. 싫다는 걸 억지로 달래 진아 손에 만 원 권 지폐도 한 장 쥐어줬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합작으로 엉성하지만 정성 담긴 김밥을 준비해 진아에게 건넸다. 가을국화 같은 환한 미소로 학교로 향하는 진아를 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지난날 못 갔던 수학여행을 마치 내가 대신 하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 며칠 후, 진아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저녁 때 귓불이 발갛게 물들어 찾아온 진아의 손엔 선물꾸러미가 들려있었고, 풀어보니 그건 도자기로 빚은 부부찻잔이었다.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감직한…. 내가 준 용돈 만 원보다 웃도는 가격임이 분명해 지난 나의 처사에 슬며시 후회가 들었다. 돈의 액수를 떠나 진아가 자존심 상할까봐, 부담을 느낄까 하여 만 원만 준 것인데.
이런 사정을 남편한테 말하니 남편은 슬며시 웃기만 한다. 실은 나 모르게 진아한테 용돈을 조금 주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나? 인정 많고 정에 약한 남편 덕분에 손해 보는 일도 많았는데 그때만큼은 그런 그가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때의 꼬마숙녀인 진아로부터 며칠 전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칠 때마다 가끔 안부전화를 해왔지만 청첩장까지 보내올 줄은 몰랐다. 아마도 남편이 공무원이라 연락처를 알아냈던 모양이다.
어여쁜 숙녀가 되어 새 출발을 앞두고 있는 진아가 그런다. 그때 내게 받았던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긍정으로 이끌게 한 힘이었다고, 부모님 이혼하신 뒤 최초로 받아본 따뜻한 마음이었다고. 부디 진아가 자신이 받았던 그 작은 온기를 꼭 누군가에게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가을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