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무섭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맞는 말이다.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설탕이 부족할 때, 중요한 물건이 배송 왔지만 받을 수 없을 때, 이웃집은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최근에야 이런 경험 자체도 거의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이웃사람>은 “이웃”에 대한 다른 시선에서 시작한다. 과거엔 이웃이 큰 힘이었지만 최근, 이웃이란 개념엔 무관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무관심이야말로 이웃에 대한 세련된 사회적 태도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테면, 옆집에서 부부 싸움이 심하게 벌어져도 아는척 하지 않는 게 세련된 거고, 아랫집에서 과도한 소음이 들려도 경비아저씨에게 인터폰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긴다. 직접 소통에 대한 불편함,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불편한 사이, 그것이 바로 이웃이다.
어떤 범죄자들에게든 부모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 영화가 <싸이코>(히치콕)이었다면, ‘엄청난 살인마들도 역시 주거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가 <이웃사람>의 출발점이다. 범인이 체포된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서 듣는 후일담들도 대개 그렇다. 그는, 그냥 평범하고 조용한 이웃이었어요, 라는 목격담 말이다.엄청난 살인 행각을 벌인 사이코 패스 범죄자들도 다 누군가의 이웃이었다. 최근, 통영에서 초등학생 십대 소녀를 납치해 살인한 남자도 이웃 아저씨였다. 소녀 역시 이웃 아저씨가 차를 태워준다고 해서 덜컥 탄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미성년 성폭행범의 대다수가 면식범이라는 것은 이웃에 대한 공포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무섭다. 모르는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지만 안다는 이유만으로 약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범죄자들은 그 허물어진 틈 사이로 살의를 심는다. 영화 <추격자>의 마지막 장면만 해도 그렇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살인마가 동네 슈퍼마켓에 들르자 이 사실을 모르는 주인아주머니가 그에게 하소연을 한다. 우리 집에 미친놈에게서 도망친 여자가 있으니 제발 같이 있어달라고, 무서워 죽겠다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주머니는 “그”를 선량한 이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웃에
대한 외면
그리고
관심
영화 <이웃사람>의 출발점도 <추격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좀 이상한 “이웃 사람”이다. 실내에서 전깃불을 잘 켜지 않고, 집도 잘 정리해 두지 않는다. 반장 아주머니가 반상회에 참여하라고 독촉하지만 인상을 쓸 뿐 대단한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심지어, 사채업자인 다른 동네 주민에게는 무참히 맞기도 한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범죄형이라기보다, 뭔가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그 아파트에 사는 한 소녀가 사라진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아이는 빨간색 트렁크 가방 안에서 토막 난 사체로 발견된다. 소녀의 엄마는 심각한 죄책감에 빠져든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녀가 소녀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해 두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두번째는 그녀가 새엄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 때문에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여기며 자책한다. 문제는, 밝혀지지 않는 범인에 대한 의심들이 하나둘씩 발견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동네 가방가게 아저씨는 빨간 트렁크를 사 간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 내고, 피자 배달부 소년은 남자의 규칙적 배달 패턴에서 수상한 점을 찾아낸다.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한 경비원은 심지어 의심스러운 남자의 집을 찾아가 결정적 증거를 목격하기도 한다. 수챗구멍에 피에 얼룩진 머리카락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범인은 밝혀진 셈이다. 관객도, 등장인물도, 누가 범인인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인을 신고하지 못한다. 가방가게 주인은 괜히 경찰서에 오가며 장사에 지장만 줄 것이라며 외면하고, 피자 배달부 소년은 입대 일이 얼마 안 남았다며 관심을 거둔다. 결정적 단서를 손에 쥔 경비원은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애써 사실을 모르는 척 한다. 그러니까 <이웃사람>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 이웃에 살인자가 있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 바로 그 살인마를 모르는 채 은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이웃이 가장 공포스럽겠지만, 영화는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범죄는 시작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 위험은 두번째 살인 가능성으로 점점 구체화된다. 죽은 소녀와 같은 학년인 아이가 오가자, 범인은 그 아이 역시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분리 수거물 중에서 사라진 소녀의 교복을 발견한 경비원은 이미 살해한 후이다. 만일, 그를 의심했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신고만 했어도 경비원은 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게다가 살인마의 위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해서, 외면했던 그 ‘이웃 사람’ 역시 잠재적 피해자일 수 있는 셈이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 김복남은 자신을 괴롭혔던 남편 형제뿐만 아니라 그녀가 당한 수모를 보고도 모른 척해 온 마을 사람들에게도 복수를 감행한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모르는 척 외면해 온 사람들도 공모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영화 <이웃사람>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이웃사람으로서 관심을 기울일 때 위험한 이웃사람의 손에서 우리의 아이, 우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강풀의 만화는 여러번 영화화되었다. <아파트>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이 영화화되면서 만화와의 싱크로율을 상당히 신경 써왔음을 알 수 있다. <이웃사람> 역시 한 장면, 한 장면 원작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이 유사성은 재창조의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화로 보았을 때 충격적이었던 장면들이 스크린 상에서 어쩐지 나약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충실한 재현보다는 창조적 재해석이 더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이웃사람> 역시 강풀의 만화 원작이라는 점이 강조된 재현작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그다지 새로운 부분은 없고, 원작의 아우라를 쫓아간 흔적은 강렬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원작을 찾아 다시 읽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이웃사람> 감독 : 김휘 출연 : 김윤진. 마동석. 김새론
이달의
신작
books
나비의 무게
(Il Peso della Farfalla)
<나비의 무게>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탈리아의 국민작가이자 등반가이며 성서 번역가이기도 한 에리 데 루카(Erri de Luca)의 소설이다. 거대하고 강인한 산양과 고독한 한 사냥꾼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숭고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유한한 인간이 읊조리게 되는 경건한 기도 같은 느낌을 담고 있다. 여리고 힘없는 새끼였을 때 사냥꾼의 총에 어미를 잃은 산양 왕. 잔혹한 고난들을 이겨내고 강력한 힘을 키운 산양 왕은 세상에 두려울 것도, 이루지 못할 것도 없는 존재로 절대 권력을 누리며 왕국을 지배한다. 그의 왕국에도 여지없이 시간은 흐르고,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힘센 수컷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산양 왕은 평생 그의 뒤를 쫓았던 사냥꾼과의 마지막 결투를 선택한다. <나비의 무게>는 나이 든 사냥꾼과 거칠 것 없는 산양 왕, 두 강인한 단독자의 최후를 보여주며 누구나 한번은 마주해야 할 삶의 마지막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살아온 날들의 무게 위에 슬며시 내려앉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떠올리며, 무엇을 느끼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문예중앙 / 에리 데 루카 저, 윤병언 옮김
play(theater)
아워 타운(Our Town)
1938년 초연 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손톤 와일더의 <아워 타운>은 국내에 <우리 읍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연극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만남과 이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소소한 사건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평범한 마을의 평범한 아침. 어느 집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고 우유배달부는 우유를, 신문배달부는 신문을 배달하고 엄마는 등교를 위해 아이들을 깨운다. 아빠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일반적인 하루하루. 아이들은 자라 부모가 되고, 젊고 열정적이었던 부모들은 흰머리 희끗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세월의 순리. 탄생과 죽음이 교차되는 <아워 타운>은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재’의 모습이기에 더 공감이 간다. 독창적인 미장센과 강렬한 무대 에너지를 표출하는 한태숙이 연출을 맡아 보다 따뜻한 정서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박용수, 서이숙, 김명수, 박윤희, 김세동 등 연극계 실력파 배우들의 합세로 더욱 기대되는 연극이다.
명동예술극장 / 9월 18일(화)~10월 14일(일)
exhibition
겸재부터 혜원까지,
천재화인열전
조선시대 문화사에 있어 눈부신 황금시대로 지칭되는 조선후기는 우리나라 산천의 실제 경치를 소재로 족자적인 그림세계를 이룩한 진경산수화와 시적인 정취와 묘사의 사실성이 돋보이는 영모화, 신선 그림인 도석인물, 문인들의 시서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고유색이 두드러진 빛나는 시기였다.
<겸재부터 혜원까지, 천재화인열전>에서는 겸재 정선을 포함한 석봉 한호,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29명 작가의 18~19세기 서화 44점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4개의 대주제로 구분한 전시는, ‘관(觀)-예(禮)를 통해 인(仁)을 짓다’, ‘폭(景)-현실에서 무릉도원을 보다’, ‘속(俗)-세상의 마음으로 세상을 그리다’, ‘도(道)-붓끝으로 도리를 새기다’로 나누어 관람객들이 옛 그림을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했다. <겸재부터 혜원까지, 천재화인열전>은 익살과 긍정이 어우러진 삶의 낙천성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 맑고 밝으며 착하고 어진 우리 민족의 심성이 진솔하게 반영 된 옛 그림을 통해 조선의 천재화인들의 삶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다.
포스코미술관 / ~9월 25일까지
classic
아름다운 조우
창단 50주년을 맞은 국립발레단이 다양한 분야의 예술과 협업을 시도했다. <아름다운 조우>는 국립발레단의 또 다른 시도이자 도전이 엿보이는 공연으로 대한민국의 가야금 명장 황병기 음악과 발레의 만남이다. 황병기가 연주하는 가야금 선율 위에 각각의 안무가들이 다양한 색깔로 개성 있게 연출할 <아름다운 조우>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뿐 아니라 한국 전통음악의 아름다움을 발레로 표현해 그 가치를 세계화할 수 있는 작업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첫번째 안무가인 니콜라 폴은, 파리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해 쉬제등급✽까지 오른 실력파 무용수로 우리 정통국악을 어떻게 무대에 펼쳐놓을지 궁금증과 기대를 갖게 한다. 두번째 안무가인 박일은, 국립발레단의 현 발레 마스터로 2005년 국립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에서 <아도니스>를 안무하여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으며, 국립발레단원들의 장점을 부각할 수 있는 최고의 안무를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인 세번째 안무자 정혜진의 무대도 기대를 모은다.
<아름다운 조우>는 황병기의 친절한 해설도 곁들여진다.
LG아트센터 / 9월 27일~9월 28일
festival
제14회 효석문화제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유망축제(축전)✽로 선정된 <제14회 효석문화제>가 ‘소설처럼 아름다운 메밀꽃 밭’이란 주제로 9월 7일부터 16일까지 10일간 메밀의 고장인 평창군 봉평면에서 열린다. 문학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메밀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부제로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다채로운 문학 행사를 비롯, 다양한 체험 기회와 공연 등이 봉평면 일대에서 펼쳐진다. 효석문화제를 위해 이효석 문학선양회와 봉평면 주민들은 300여 만㎡ 부지에 메밀을 심고 꽃밭을 조성했다. 물레방앗간과 이효석 생가터 주변 등지에도 메밀밭을 조성해 이효석 문학의 순수함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이번 효석문화제는 효석문화마을과 흥정천 개울, 먹거리촌을 중심으로 메밀꽃밭 오솔길, 봉숭아 물들이기, 캐리커처 등 7가지의 자연체험과 통나무 빨리 자르기, 우마차 끌기 등 8가지의 전통체험, 기념 기획전 등 26가지의 상설체험 행사가 열린다. 야간에 열리는 메밀꽃밭 프로그램은 가을밤의 정취를 물씬 느끼기에 제격인 효석문화제의 백미다. 맑고 깨끗한 봉평의 메밀밭에서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9월 7일~9월 16일 / www.hyoseok.com
✽ 축전 : 축제의 순화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