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일 경인체신청이 경기도 수원에서 개청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서울체신청은 서울특별시만 관할하고 분리된 경인체신청은 경기도와 인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체신청은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관할하고 있어 담당 지역으로 보면 넓은 편이 아니었으나, 전국 접수우편물의 80%를 차지할 만큼 업무량이 많아 분할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했는데, 마침내 그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인체신청이 신설되면서 서울체신청은 서울특별시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시에 전국의 체신청은 9개로 늘어났다. 경인체신청은 새로운 조직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기체신청이 존재하고 있었다. 관할지역은 경기도 일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천은 직할시가 아니어서 경기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2년 1월 한국통신(KT)이 발족하고 체신부 조직이 축소되면서 경기체신청이 서울체신청에 통합되었다. 그런데 수도권이 비대해지고 서울체신청의 업무량이 급증함에 따라 29년 만에 경인체신청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2011년 5월 30일 경인체신청의 이름이 경인지방우정청으로 바뀌었다. 지식경제부가 직제를 개편하면서 ‘체신청’이라는 명칭을 ‘지방우정청’으로 개칭했던 것이다. 그처럼 체신청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관할 지역에도 변동이 있었다. 100여 년의 우정의 역사에서 체신청의 명칭과 관할구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관리사무분장 우편국이 체신청의 모체
체신청은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이었다. 1905년 일본은 한일통신기관협정을 강요하고 우리 통신권과 통신기관을 강탈했다. 을사조약에 의해 조선의 외교권마저 빼앗은 일제는 1906년 1월 통감부(統監府) 산하에 통신관리국(通信管理局)을 설치하고 우리 땅에 일본식 우편제도를 그대로 이식했다. 그때 통신관리국에서 직접 맡지 않아도 될 단순한 관리업무를 전국의 주요 우체국에 위임했는데, 그들 우체국을 ‘관리사무분장우편국 (管理事務分掌郵便局)’이라 했다. 경성우편국을 비롯한 부산, 인천, 원산, 군산, 목포, 평양, 의주 등 8개 우편국이 관리사무분장우편국으로 지정되었다. 1908년에는 8개 우편국 중 의주우편국이 제외된 대신 신의주우편국과 청진우편국이 추가되어 9개로 늘어났다. 이처럼 큰 우체국이 감독기관이 되어 관내에 있는 작은 우체국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뒷날의 체신청의 모체가 되었다. 그 당시 경성우편국은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및 황해도 일부를 관할했는데, 그것이 바로 서울체신청의 출발점이 되었다. 인천과 부평, 강화 그리고 황해도 일부의 관리는 인천우편국이 맡았다. 또 부산우편국은 경상남북도와 거문도를 관할구역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부산체신청의 효시였다.
한일합병으로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9개로 늘어난 관리사무분장우편국이 경성, 부산, 평양, 원산 등 4개 우편국으로 축소되었다. 그들 4개 우편국이 전국을 4등분 하여 관장했는데, 1914년에 확정된 관할 지역을 보면, 경성우편국이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전라북도, 강원도 및 황해도의 일부였고, 부산우편국이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평양우편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의 일부, 원산우편국이 함경남북도와 강원도의 일부였다. 일본의 대륙 진출이 본격화되고 있던 무렵인 1934년, 일제는 관리사무분장우편국의 명칭을 ‘체신분장국(遞信分掌局)’으로 바꾸고 하부 조직으로 감독과, 보험과, 공사과, 회계과를 설치했다. 그리하여 현업기관에 대한 감독 기능을 강화했다. 그때부터 체신분장국은 뒷날의 체신청과 유사한 조직과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940년 체신분장국의 명칭이 ‘지방체신국 (地方遞信局)’으로 바뀌면서 관할 구역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성지방체신국은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강원도, 전라북도를 관할했고, 부산지방체신국은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평양지방체신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그리고 원산지방체신국은 함경남북도를 관할했다. 8·15광복 직후 남북 분단이 굳어지면서 지방체신국도 분할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지배하는 38선 이북의 평양지방체신국과 원산지방체신국은 체신부 관할에서 떨어져 나가고 서울지방체신국과 부산지방체신국은 남게 되었다. 지방체신국의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다. 1946년 4월 미군정청 체신국이 체신부로 승격하면서 지방체신국을 ‘체신국(遞信局)’이라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경성지방체신국은 경성체신국으로 개칭되었는데, 1947년 1월 1일 일본식으로 부르던 체신관서의 명칭을 한국식으로 환원함에 따라 서울체신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체신청에서 지방우정청으로 개칭
1949년 6월 제2대 체신부장관으로 부임한 장기영은 체신위원회(遞信委員會)를 설치하고 지방체신관서의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을 공포했는데, 그때 체신국의 명칭이 ‘체신청(遞信廳)’으로 바뀌었다. 그해 11월에는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을 개정하여 대전체신청과 광주체신청을 신설하고 체신청에 총무과, 우정과, 전무과, 보험과, 회계과를 두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 16일에 대전체신청, 1월 18일에 광주체신청을 개청했다. 그때부터 서울체신청은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부산체신청은 경상남북도, 대전체신청은 충청남북도, 광주체신청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체신청의 관할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하고 체신부 역시 부산체신청 청사로 옮기게 되자 발족한 지 8개월밖에 안 된 대전체신청이 폐지되고 그 업무가 서울체신청으로 이관되었다. 그 뒤 정부가 서울로 복귀하고 서울체신청 역시 서울로 되돌아옴에 따라 1952년 12월 대전체신청이 부활되었다. 그 뒤 체신청의 관할 영역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4개로 고정되어 있던 체신청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8년 11월 체신부는 서울체신청 관할인 경기도와 강원도를 떼어내 중부체신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서울체신청은 서울특별시 지역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어 1971년 1월에는 대구체신청, 그 해 4월에는 전주체신청을 신설했고, 1972년 6월에는 중부체신청을 수원체신청과 원주체신청으로 분리하면서 충청북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 도에 하나씩 체신청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체신청이 4개에서 8개로 늘어났다. 1979년에는 각 체신청의 명칭을 바꾸었다. 대전체신청을 충청체신청, 광주체신청을 전남체신청, 수원체신청을 경기체신청, 대구체신청을 경북체신청, 전주체신청을 전북체신청, 원주체신청을 강원체신청으로 개칭했다. 도청 소재지의 명칭에서 도청의 명칭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1982년 1월 한국통신(KT)이 설립되고 전기통신사업이 떨어져 나가면서 체신청의 기능과 업무가 대폭 축소되었다. 체신청의 기구 축소는 물론 일부 체신청의 폐지가 불가피했다. 체신부는 체신청을 완전히 폐지하거나 그 숫자를 절반으로 줄이는 방안 등을 놓고 총무처와 협의한 끝에 체신청의 조직을 축소하는 한편, 경기체신청을 폐지하여 서울체신청에 통합시키고, 각 체신청에 직영우체국을 두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1990년 12월에는 제주우체국을 제주체신청으로 승격시켰다. 제주우체국은 이미 1983년 전남체신청에서 분리되어 본부 직할관서로서 체신청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고, 체신청장 직급 역시 서기관에 머물고 있어 형식적인 개편일 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2010년 11월 경인체신청이 부활함으로써 체신청의 숫자는 9개로 늘어났다. 이어 2011년 5월 그 명칭이 지방우정청으로 바뀜에 따라 체신청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체신’이네 ‘체신청’이네 하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낯선 느낌을 준다. ‘체신’이라는 말은 ‘우체’와 ‘전신’의 합성어로 알려졌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편과 전기통신을 아우르는 낱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편사업과 전기통신사업을 같이 운영하던 체신부 시절에는 합당한 용어라 할 수 있으나, 전기통신사업이 떨어져 나가고 우정사업만을 운영하는 우정사업본부와는 거리가 있는 낱말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체신청’이라는 이름을 ‘지방우정청’으로 바꾼 것은 수긍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체신청장 임명이 취소된 사연
대전체신청과 광주체신청이 동시에 개청된다 하자 청장 자리를 놓고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자천과 타천을 합쳐 10여 명의 후보가 각축을 벌였다. 장관이 간부들의 의견을 들어 대전청장에 서울중앙전화국장 정대갑, 광주청장에 부산청 총무과장 김동완을 승진시키기로 했다. 정대갑은 가정 형편상 지방에 갈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기에 취소되었고, 김동완은 너무 서두르다 취소되었다. 김동완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신설 체신청을 이상적으로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체신청의 과장과 계장 인선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그 소식이 장관의 귀에 들어간 바람에 내정 방침이 백지화되었던 것이다. 새 후보로 대전청장에 부산우체국장 이송우, 광주청장에 광화문우체국장 민태식이 내정되었다. 그 중에서 이송우는 별 탈 없이 청장 자리에 올랐으나, 민태식은 또다시 낙마했다. 발령일을 하루 앞둔 날 저녁,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민태식이 우정국장 최재호에게 전화를 걸어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최재호는 잘되었다며 절대로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때 마침 서울중앙전신국장 이응구가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친한 사이기에 민태식은 별 생각 없이 잘되었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아침 장관이 출근길에 을지로를 지나는데 이응구가 걸어가고 있었다. 장관은 자동차를 멈추고 그를 태웠다. “광화문우체국장이 광주청장으로 내정되었다죠?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이응구는 엉겁결에 엉뚱한 인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장관은 인사비밀이 누설되어선 안 된다며 민태식을 승진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처럼 인사비밀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고,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게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