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은 체신부 사람들에게 매우 어수선하고도 바쁜 한 해였다. 한국전기통신공사(KT)의 설립을 1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한국통신이 설립되면 전기통신 분야의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기에 기대와 불안으로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었고, 체신부에 남는 사람들은 우체국의 일거리가 대폭 줄어들므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 설립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어느 날, 우정국 환금관리과장 김군회가 차관실을 노크했다. 차관 오명을 만나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차관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1977년 농협으로 이관했던 우편저금사업을 부활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내년 1월 전신전화사업이 공사로 넘어가게 되면, 우체국 창구가 텅 비게 될 겁니다. 전신전화사업에다 전화교환원마저 넘어가고 나면 우체국 창구에서 뭘 하겠습니까? 특급우편이네 전자우편이네 해서 새로운 우편 서비스를 개발한다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아무래도 우체국 창구 직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려면 우편저금 업무를 부활시키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김 과장 말이 맞아요. 그렇잖아도 공사화가 되고 나면 우체국 창구 업무가 절반으로 줄어들 것 같아 걱정인데, 우체국 창구 직원들에게 일거리다운 일거리를 제공하려면 우편저금 업무를 부활시키는 게 맞아요.” 뜻밖에도 오명이 맞장구쳤다.
“재무부의 반대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죠.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어렵겠지만, 차관님이 밀어주시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우체국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우편저금사업을 부활시켜야 해요.” 체신부 차관 오명과 환금관리과장 김군회는 그렇게 1977년 농협으로 이관했던 우편저금사업을 부활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환금관리과장 김군회가 직속상관인 우정국장을 제쳐놓고 차관을 찾아가 우편저금사업의 부활을 건의한 것은 우정국장 김용봉이 우편저금사업의 부활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용봉이 우편저금사업의 부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의 부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재무부를 찾아가 몇몇 간부들을 만났던 것인데, 그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부정적이었기에 아예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저금사업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김군회의 건의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70년 역사를 지닌
우편저금·보험사업을 이관하다
우체국에서 우편저금사업을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 통신권을 일본에 빼앗기면서부터였다. 1905년 일본은 한일통신기관협정을 강요하여 우리나라 통신권을 강탈했다. 그때 일제는 전국 각지의 우체사를 이미 국내에 설치되어 있는 일본 우편국에 통합하는 한편, 일본 우편국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운 이름의 우편국을 설립했다. 우리 고유의 명칭인 ‘우체사’가 일본식 명칭인 ‘우편국’으로 바뀐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때 각 우체사에서도 일본 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있는 업무를 그대로 실시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우체국에서 저금 업무를 취급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체국에서 보험 업무를 취급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1929년 일제는 조선간이생명보험특별회계법을 제정하고 10월 1일부터 서대문우체국에서 보험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간이생명보험’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구미 각국에서는 서민보험, 소액보험, 무진사보험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에서 간이생명보험제도가 실시된 것은 1916년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12년부터 이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다 1929년에 이르러서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처럼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우편저금 및 보험사업을 농업협동조합으로 넘긴 것은 1977년이었다. 그 어려운 작업을 거침없이 단행한 사람은 체신부 차관 이경식이었다.
1976년 4월 청와대 경제 제1수석비서관에서 체신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경식은 부임하자마자 우정국 저금보험과장 박영환을 불러 우편저금·보험사업을 농협으로 이관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우정국 저금보험과는 우편저금 및 국민생명보험 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였다. 그때부터 두 사업의 이관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국민생명보험사업은 1977년 1월 1일, 우편저금사업은 동년 3월 1일 농협으로 넘겨졌다.
자금 운용의
경직성과 역금리가
발목을 잡다
우편과 함께 우체국 업무의 양대 기둥을 이루며 오랫동안 우체국 직원들과 기쁨을 같이하고 괴로움을 같이했던 우편저금ㆍ보험사업을 농협으로 이관한 것은 그들 사업이 풀기 어려운,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문제점을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는 만성적인 적자였다. 이율이 꽤 높은 시절에 돈놀이하는 금융기관에서 적자를 낸다는 게 이상했으나 아무튼 그것은 사실이었다. 1974년에 13억 원, 1975년에 10억 원으로 그들 사업이 안고 있는 적자는 매년 계속되고 있었다.
자금 운용을 체신부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적자를 낸 이유였다. 힘센 부처인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의 완력에 휘둘려 상당한 자금을 재정자금예탁금이나 국민투자기금에 맡기다 보니 자금 운용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역금리까지 발생하고 있어 적자 운영이 불가피했다.
둘째는 전문성의 결여였다. 우편저금ㆍ보험사업은 체신부의 양대 사업인 우편과 전신전화사업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부대사업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들 업무는 우정국 저금보험과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반 금융기관은 물론 농업협동조합에 비해서도 전문요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그 같은 전문성의 결여는 결국 사업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셋째는 저축기관 간의 과당경쟁이었다. 당시 농어촌을 상대로 예금 유치 경쟁을 벌이는 기관은 우체국과 농협, 새마을금고 셋이었다. 저축 여력이 한정된 농어촌에서 세 기관이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 코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다 보면 우체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고객을 찾아다니며 애걸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본연의 업무인 우편이나 전신전화 업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문제점 중 가장 풀기 어려운 것은 첫 번째였다. 전문성의 결여는 조직을 늘려 전문성을 강화하면 될 것이며, 경쟁이란 하면 할수록 성과가 오르는 법이다. 하지만 재정자금에의 예탁을 중단한다거나 역금리 발생을 막는다는 것은 힘없는 부처인 체신부로서는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차관 이경식이 그들 사업을 농협으로 넘기도록 지시한 것도 그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우편대체에
예금 기능을 부여하다
1978년 12월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재설은 장관 자리에 앉자마자 전해에 농협으로 이관한 우편저금·보험사업을 부활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관의 주역인 이경식이 차관 자리에 눌러앉아 있는 데다, 재무부에서 전혀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 작업은 진전되지 않았다. 서울체신청 우정과장 김군회가 우정국 환금관리과장으로 발탁된 것은 1981년 2월이었다. 그때까지 우체국 금융사업은 우편환과 우편대체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송금 업무에 해당하는 우편환은 그 이용이 극히 부진했고, 송금에 이체 기능을 겸비하고 있는 우편대체는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아 유명무실한 제도에 불과했다. 일 욕심이 많은 김군회의 눈으로 볼 때 우체국 금융사업을 활성화하는 길은 우편저금제도의 부활밖에 없었다. 특히 한국통신의 발족으로 전기통신사업이 분리돼 나가고 우체국 창구 업무가 절반으로 감축될 때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우편저금제도의 부활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우편저금제도의 부활은 체신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재무부는 물론 농수산부와의 협의도 거쳐야만 했다. 재무부는 국가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부처이기에, 농수산부는 농협의 감독기관이기에 그들 기관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재무부도, 농수산부도 체신부가 또다시 금융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 일에 협력하려 하지도 않았다. 김군회는 우선 편법을 써 금융사업을 재개하는 길을 터놓았다. 우체국에서 국세, 지방세, 전기요금 등 각종 공과금의 수납과 연금 지급 등의 업무를 취급하는 길을 마련하는 한편, 우편대체법을 개정하여 우편대체계좌를 통해 예금 업무를 취급하는 길을 터놓았다. 자금의 송금과 수금, 이체 기능을 가진 우편대체제도에 예금 기능을 추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2년 개정된 우편대체법을 근거로 통지계좌제도를 실시한 뒤, 거치계좌와 개인계좌로 예금의 종류를 늘려나갔다. 통지계좌는 보통예금, 거치계좌는 정기예금에 해당하는 상품인데, ‘예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어 그처럼 구차스러운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우편대체제도에 예금 기능을 부여했다 해서 우편저금사업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우편대체계좌 이용자는 극히 적었고, 일반인은 우체국을 저축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 예로 우편대체제도를 활성화한다 해서 10개월 동안에 10만 계좌로 늘렸는데, 그중 80% 이상이 수면계좌였고, 거기에 모인 자금 550억 원 중 350억 원이 체신부 돈이었다. 한마디로 체신부 사람들이 체신부 돈으로 우편대체를 이용하고 있다 해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은
오명 차관
우편저금사업을 다시 시작하려면 관련 법령의 제정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으나, 환금관리과장 김군회는 우편저축법의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금융 당국인 재무부의 반응이 부정적이어서 법 제정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그때까지도 재무부는 반대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방안 퉁소에 불과한 우정국장 김용봉은 안방에서 큰소리칠 뿐 재무부 국장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교섭 역시 과장 김군회가 도맡아야만 했다. 그처럼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김군회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은 차관 오명이었다. 1981년 5월, 41세라는 연부역강(年富力强)한 나이에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된 오명은 권력의 실세였다. 오명이 차관으로서 소신껏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과의 친분 덕분이었다. 국보위 상공자원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오명이 국보위 근무를 마치고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원대복귀하려 하자 그를 붙잡아 청와대 경제비서실로 이끌었던 사람이 김재익이었고, 그가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되자 그의 개혁 정책을 적극 뒷받침한 사람이 김재익이었다. 철권정치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대통령 전두환이 경제정책만큼은 경제수석 김재익에게 맡기다시피 했기에 경제 분야에서의 김재익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막강했다. 별 영양가 없는 부처의 차관인 오명이 재무부 장관 강경식을 찾아가 체신금융사업을 부활시켜 달라며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배경 덕분이었다.
아무튼 체신금융사업의 부활이 시급한 과제였으나, 그것을 추진할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재무부는 체신부에서 ‘예금’ 이야기만 꺼내면 반대했기에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김군회는 차관 오명을 모시고 재무부 장관실로, 국무총리 행정조정실로 찾아다니며 우편저금을 되살려달라고 읍소했으나, 재무부 실무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그 난해한 수수께끼가 엉뚱한 데서 풀렸다. 재무부 장관 강경식이 우체국에서 국공채를 팔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우체국에서 국공채를 판매할 수 있는 방안을 찾다 보니 재무부가 우편저금법의 제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군회는 예금만을 취급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보험까지 취급하기로 했다.
“하루는 오명 차관이 우체국에서 국공채를 팔면 어떻겠냐고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법적 근거가 없으니 법을 만들어야 한다, 우편저금법을 만들어 거기에 국공채 판매 규정을 넣으면 될 것 같다 했더니 검토해 보라 하셨어요. 처음엔 예금과 국공채 관련 조항만 넣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예금만 취급하게 되면 직원들에게 수당을 줄 방법이 없더라고요. 수당을 줄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니 보험이었어요. 그래서 보험을 추가해서 ‘체신예금ㆍ보험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던 거죠.” 환금관리과장 김군회의 말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 판결을
내리다
재무부에서 동의했다 해서 ‘체신예금ㆍ보험에 관한 법률’의 제정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재무부라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고 나자 농수산부가 딴죽을 걸었다. 경제차관회의에서 그 법률안을 심의할 때였다. 농수산부 차관 강인희가 1976년 말 우편저금·보험사업을 농협으로 이관하기로 한 사유를 조목조목 낭독하고 나서 그때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느냐고 물었다. 일순간에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의례적인 절차로만 생각했던 경제차관회의에서 기습을 당하자 눈치 빠른 차관 오명이 법률안을 보류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배석한 간부들에게 빨리 농수산부와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환금관리과장 김군회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농수산부 간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동안의 경제성장률과 농어촌 저축성장률을 비교한 통계자료를 만들어서 찾아다니며 우체국 예금사업을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다. 저녁에 집으로 찾아다니며 잘 봐달라고 인간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처럼 농수산부 쪽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지 못하도록 사전 공작을 펼쳤다. 그의 로비가 주효했던지 다음번에 열린 경제차관회의에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재무부 장관까지 사인했음에도 재무부 간부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은 법 조문 하나하나를 붙들고 시비를 걸었다. 총론에는 찬성하면서 각론에서는 조목조목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러자 그 문제는 결국 청와대 경제비서실을 거쳐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게 되었다. 대통령 전두환이 재무부와 농수산부, 체신부 간부들을 좌우로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땐 우체국에 가서 저금도 하고 그랬는데, 아직까지도 그 기억이 새로워요. 근데 우체국 저금제도가 왜 없어졌어요? 우체국 저금제도야 살리면 될 것 아니오?”
“우체국 저금제도를 살리게 되면 농협이 죽습니다.” 재무부 간부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축기관이 많은 게 왜 문제가 되지? 국민의 입장에선 저축기관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오. 국민들이야 농협이 가까우면 농협에 가서 저축하고, 은행이 가까우면 은행에 가서 저축하고, 우체국이 가까우면 우체국에 가서 저축하면 되는데, 저축기관이 많은 게 뭐가 나빠요. 우체국도 예전처럼 저금업무 취급하도록 해요.” 전두환이 그처럼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체신예금·보험에 관한 법률’은 그렇게 제정될 수 있었다. 1982년 12월 31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1일 동법시행규칙까지 제정하자 죽었던 체신금융사업이 되살아났다. 농협으로 넘긴 지 6년 반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