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체신사업의 특징
일제 35년간은 그 식민통치정책의 변화에 따라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한일합병 으로부터 1919년의 3 • 1운동에 이르는 이른바 武斷統治 시기이며, 제2기는 3 • 1운동 이후부터 1931년의 만주사변 도발까지의 이른바 文化統治 시기이며, 제3기는 만주사변 이후부터 1945년의 8 • 15 광복까지이다.
제1기의 무단통치 시기는 의병운동 • 애국계몽 운동을 탄압하면서 한일합병을 강요한 일본이 한민족의 한일합병 반대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시대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해산시키고, 또 대한제국 시대의 근대화 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발행되던 신문 • 잡지 일체를 폐간시키는 한편, 역시 조국 근대화에 큰 몫을 담당하였던 신교육운동과 신종교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의병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본 군대를 대량으로 투입, 이른바 南韓 大討伐作戰을 전개하여 의병 부대를 제압하고 憲兵警察制度를 실시하여 한반도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식민지 관료들은 문관까지 도 칼을 차고 행정에 임하였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유례가 없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은 한민족의 저항이 그만큼 거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는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무단통치를 통하여 식민지 체신사업은 확장되어 나갔다. 대한제국 시대에도 이미 근대적 통신 시설이 확장되어 왔지만, 1905년 일본이 그것을 강탈한 후 식민지 통신사업으로 재편성됨으로써 급격히 확대되어 왔던 것이다. 1907년 고종의 퇴위를 계기로 의병의 항일운동이 치열해지자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사업을 한국민을 강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 기간의 통신시설의 확대는 한국인의 이용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또 그 과정에서 한반도에 대량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일본인 거류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와서 우편기구가 확대되고 우편위체(우편환)제도나 우편저금제도가 본격화 한 것이나 국제우편이 확대된 것도 역시 한국인 의 이용 증대에 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목적 및 식민지 첨병으로서의 주한 일본인의 이용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전신 •전화사업에 있어서는 경비통신망의 확장 • 강화를 비롯한 軍 • 警通信施設과 對日 • 對滿 통신망의 강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중통신에 기여한 바는 극히 미약하였다.
한일합병 후 10년에 걸친 무단통치는 3•1운동으로 일단 종식되었고, 1920년대에는 식민지 지배의 제2기인 文化統治 시기가 전개되었다.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어 관리들이 칼을 품고 약간의 한국인 언론 및 사회단체 구성이 허용되었으나, 이는 3 • 1운동으로 무단통치적 식민지 지배 정책이 파탄에 빠진데 당황한 일본이 한편으로宥和政策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저항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1920년대의 이른 바 문화통치 시기를 통하여 민족주의자의 일부가 일본의 정책에 말려 들어 친일파화하였고, 식민지 통치정책도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했으며, 체신행정도 식민지 통치체제를 뒷받침할 만큼 정착되어 갔다.
3 • 1운동 기간 중에는 식민지 지배기구의 일익이던 우편관서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전국 각 지에서 시위군중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전신전화 시설이 파괴됨은 물론 우편물의 수송도 저지되었다.
또한 3 • 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활동에도 국내와의 통신을 위한 聯通府 • 交通局 등의 조직이 이루어져 한때나마 독립운동전선의 통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일본 독점자본의 한국 침투를 위한 우편기관의 확층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전기 통신의 경우 제1차세계대전이 중반에 들어선 1916년을 전후하여 빈약하게나마 진행되어 오던 공중통신시설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던 반면에 전기통신의 이용은 배전의 비율로 상승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에는 전신전화 확장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불가피한 재정긴축정책으로 그 추진을 미루어 오다가 1930년에 제2차 확장계획을, 다시 1937년에 제3차 확장계획을 수립, 실시하였다. 이러한 확장계획의 실시 의도는 식민지 수탈정책의 강화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본 본토와 만주 • 북중국을 연결하는 통신망의 확장뿐만 아니라 1923년 이후로는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항공기 및 선박과의 통신시설에도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도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어 공중통신의 부족 현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우편시설의 확장 역시 매우 제한적인 것이어서 일본 본국의 그것과 비교할 때 훨씬 뒤떨어졌고, 당시의 일본의 다른 식민지, 즉, 대만 • 사할린 지방의 그것보다 뒤떨어진 것이었다.
文化統治를 가장한 유화정책 및 민족분열정책의 시기는 1931년의 만주사변을 계기로 끝났다. 그 후 일본의 침략전쟁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가 무조건항복으로 일제가 패망 하기까지의 약 15년간은 한민족에 대한 同化政策이 한층 강화되었고, 또 한민족에 대한 전쟁 협력 요구가 강화되었다.
식민통치의 제3단계라 할 이 기간에 일본은 이른바 內鮮一體유를 강조하고, 한국인에 대하여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며 이른바 皇國植民化政策을 철저히 하는 한편, 강제 저축, 國債의 강매, 생명보험의 강행, 우편연금의 증강, 국방헌금의 강요, 강제 공출 등을 통하여 전쟁비용을 조달하기에 광분하였고, 근로동원, 報國隊 징용, 女子挺身隊의 징발, 징병제도의 실시 등을 통하여 한국인의 전쟁 협력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 전쟁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체신 행정도 전쟁 수행을 위한 뒷바라지를 그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만주사변 • 중일전쟁으로 확대되면서 한반도는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되었고, 체신행정은 만주 • 중국과 일본 본토를 잇는 중계 역할을 하는 한편 전쟁비용 조달을 위하여 총력을 집중하였다. 특히 우편 저금과 간이생명보험사업은 전쟁비용 조달의 큰 몫을 하였고, 우편환의 이용이 계속 증가하면서 일본에 대한 송금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일본 정부는 거액의 전쟁비용을 赤字公債의 발행으로 조달하였으므로 계속 低金利政策을 쓰면서 국민의 저축을 강요하였고, 우편저금은 그것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8년부터 우편저금은 그 목표를 미리 정하여 놓고 그것을 달성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1929년부터 실시 된 간이생명보험은 그 사업 자체로 막대한 이익을 냈을 뿐만 아니라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적립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체 수입의 60% 가량을 적립한 간이생명보험은 1941년에 1억원, 1943년에 2억원을 적립하게 되었는데, 침략전쟁이 본격화된 1937년부터는 그 대부분이 국채 인수에 투입되어 전쟁비용으로 충당되었던 것이다.
한편 1941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되자 전기 통신사업도 방위통신체제로 개편되어 일제가 공언한 바와 같이「국방의 제2軍」으로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한글 전보의 사용이 금지되고, 전화 통화에 있어서도 日語로 제한되었으며, 전보 특수취급이 제한되었고, 전화 이용도수가 제한되고 통화시분이 단축되었다. 전쟁이 심화됨에 따라 공중전기통신시설 이용에 대한 제한은 더욱 심해져 급기야는 일반인의 사용을 중지시키기에 이르렀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는 1945년부터 케이블•裸線•교환기 등의 전화설비를 강제로 징발함으로써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에게 빈 껍데기만 남기게 되었다.

초대 체신부장 吉元鳳과 초대 체신부장관 尹錫龜
美軍政廳 遞信局의 등장
해방 후 한달만인 9월 12일 美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 의하여 아베(阿部信行) 조선총독이 파면되고 아놀드 소장이 軍政長官으로 임명됨으로써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政務總監을 비롯한 각 국장급 일본인 간부들이 미군으로 경질되었는데, 9월 14일에는 일본인 이토(伊藤泰吉) 체신국장이 파면되고 그 대신 헐리히(W.J. Herlihy) 중령이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헐리히는 이토로부터 직접 체신사업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38 이남지역의 체신사업은 일본인으로부터 미군이 직접 인수하는 형식을 밟아 조선 총독부 체신국이 미군정청 체신국으로 바뀌었다.
체신국장에 취임한 헐리히는 전 직원에게 ① 과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와 마찬가지로 근무할 것, ② 문서는 종래와 같이 일본어를 사용하여도 무방함, ③ 문서는 파기할 수 없음 등의 지시를 내렸고, 이어서 각 과에 미국인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이처럼 체신국은 미군정청에 의하여 접수되었으나, 조선총독부 시절의 통치기구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토 체신국장을 제외한 과장급 이하의 일본인 직원들은 그대로 유임되었고, 일본어의 사용도 방치되었다. .
헐리히가 일본측으로부터 체신국을 접수할 때 인계서류를 갖추어 접수한 것은 체신본국뿐이었으며 지방체신국은 구두로 접수하였다. 그 당시의 체신사업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육군이 발행한「南韓過渡政府 활동상」이라는 일종의 PR지에「남한의 체신사업」이라는 제목하의 기사가 있다.
“1945년 처음으로 점령하였을 당시 체신국의 건물이나 시설, 비품은 모두 낡은 것 그대로였으며, 부속품과 작업도구들도 대부분 散逸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6년 동안 통신시설에 대하여 개선이나 예방 정비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시설도 서구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구식이었으며, 1920년대의 것이었다. 여러가지 시설이나 기계 설비가 일본인의 편의에 맞도록 되어 있으며, 군사적 목적에 제공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인 이토 체신국장이 해임되고 난 후에도 과장급 이하의 일본인 직원은 그대로 유임하여 체신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을 파면하고 한국인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는 우리 국민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미군정 실시 1주일 후인 9월 20일 미군정청 체신국은 일본인 과장을 그대로 둔 채 본부의 5개 과에 한국인 과장대리를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한국인 과장대리는 당분간 일본인 과장과 함께 근무하며 각종 문서와 비품, 기기 등의 유실 • 파손 여부를 확인하였다. 이들 한국인 5개 과장은 9월 26일 정식으로 과장대리의 발령을 받았다. 이어서 경성지방체신국 및 부산지방체신국의 국장 및 과장대리를 임명하였다.
한국인들이 대리로 임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간부들이 점차 해임되었다. 10월 17일에 체신국 일본인 과장 및 경성지방체신국의 국장 • 과장이 해임된 것을 시작으로 12월 30일까지는 특정우편국 일본인 국장 370여명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한국인 국장이 임명되었다. 그 결과 1945년말에는 현업기관에 이르기까지의 전 체신 관서 각 부서의 책임자는 대부분 한국인으로 교체되었다. 그리하여 체신사업은 비록 미국인 체신국장의 지휘 아래 있었지만, 체신행정권의 실무는 한국인에게 돌아왔다.
1946년 1월 1일에는 당시의 체신국 총무과장인 吉元鳳이 한국인 체신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군정청에서 수여한 사령장에는 “1946년 1월 1일 부로 조선 정부 체신국 조선인 국장에 임명하고 그 직권 행사의 權을 부여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처럼 사령장에는 군정청 체신국장이 아닌 조선 정부 체신국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과도정부 수립의 일환으로서 한국인 체신국장을 임명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그 후 吉元鳳 체신국장은 약 9개월 동안 미국인 체신국장과 함께 체신행정을 담당하였다. 즉, 1946년 3월 23일까지는 헐리히 체신국장과, 동년 9월 18일까지는 그 후임인 파슨즈 체신국장과 함께 체신행정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파슨즈가 물러난 후에는 그 후임이 임명되지 않아 단독으로 군정청 체신부장으로서 체신행정권을 담당 하였다.
美軍政廳 遞信部의 등장
해방 당시의 체신사업을 관장하던 기구로는 체신국 본부와 사무분장기구인 지방체신국, 그리고 현업기관 세 가지로 나뉘었다. 미군정청은 총독부의 체신기구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가 점진적으로 개편하기 시작했다.
해방 당시의 체신국의 기구는 5課2所 체제였다. 즉, 총무과 • 통신과 • 저금보험과 • 회계과 • 공무과의 5과와 체신이 원양성소와 간이보험 요양소의 2소였다. 그후 1945년 10월에는 간이보험 요양소가 폐지되어 5과1소 체제가 되었다. 동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행정기구 간소화작업에 따라 본부의 係가 축소되었으나 課에는 변동이 없었다. 다만 체신이원양성소를 체신학교로 개칭했을 뿐이다.
체신국 기구에 대폭적인 손질이 가해진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일이었다. 동년 4월 미군은 앞으로 수립될 과도정부에 대한 준비단계로서 우선 행정기구를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체신국은 체신부로, 종래의 課 • 係는 각각 局 • 課로 승격되었다. 체신부로의 개편에 따른 인사는 새로운 사령장을 발부하지 않고 체신국장은 遞信部長官이 아닌 遞信部長으로, 과장은 국장으로, 계장은 과장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따라서 체신부 본부의 기구는 종래의 5과1교26계 체 제에서 5국1교26과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로부터 18일이 지난 4월 26일에는 체신부 사무분장규정이 제정됨으로써 당시까지 유효하던 일제시대의 체신국 사무분장 규정이 폐지되었다. 새로운 사무분장규정에 의하여 체신부는 6국1교 26과 체제로 바뀌었는데, 이 때의 개편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일제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通信課로 묶여 있던 우편사업과 전기통신사업이 郵務局과 電務局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우편과 전기통신은 그 유래가 상이한 것이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두 업무를 구분하여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구별하여 왔는데, 일제는 식민정책의 필요에서 두 업무를 완전히 통합하여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체신부 본부의 기구는 총무국 •’ 우무국 • 전무국 • 저금보험국 • 재정국 • 자재국 • 체신학교 등 6국1교 체제로 구성되고 있었다.
당시에 설치된 電務局은 종래의 통신과의 업무 중 전기통신업무와 工務課의 업무를 통합한 것이 었다. 그리하여 전기통신에 관한 행정과 기술 업무가 일원화되어 업무의 효율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전무국의 독립과 동시에 동년 5월 1일에는 地方遞信局의 명칭을 遞信局으로 개칭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각 지방의 현업기관을 관장하는 기구로 체신국 밑에 경성 • 부산 • 평양 • 원산 등 4개의 지방체신국이 있었다. 해방 후 남북간의 분단이 굳어짐에 따라 지방체신국도 분할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평양 • 원산 등 2개 지방체신국은 본부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갔고, 서울•부산지방 체신국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 명칭이 체신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당시의 체신국은 총무과•통신과•저금보험과•회계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방 당시의 전국 현업국의 수는 서울 • 부산의 양 지방체신국 관내에 739개국, 평양 • 원산 지방체신국 관내에 415개국 등 총 1,154개국이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에 의하여 38이북 지역의 현업국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692개국이 남게 되었다.
1946년과 1947년에는 현업기관의 수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그것은 주로 인원의 부족과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폐국 조치를 단행했기 때문이 . 따라서 1945년말의 692개국이 1946년말에 는 646개국으로, 다시 1947년말에는 625개국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 기간의 체신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特定郵便局의 폐지였다. 해방 후 38 이남 지역에 남은 692개의 우편국 중에 보통우편국은 39개국에 불과했고, 나머지 651개국은 오늘날의 별정우체국에 해당되는 특정 우편국이었다. 그런데 그것의 3분의 2가량이 일본인의 개인 소유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철수에 따른 운영 문제를 하루 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군정청 체신국은 1945년 11월에 遞信事業調査委員會를 설치하고 체신사업 및 특정우편국제도의 운영 개선에 관한 사항을 조사 • 심의케 했다. 동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1946년 4월에 특정우편국에 대한 잠정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특정우편국장에 대한 수당을 일반 관리와 동일하게 하고, 직원의 급료를 도급제에서 보통우편국과 같이 직할로 할것 등 특정 우편국을 보통우편국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특정우편국은 보통우편국과 비슷하여졌으므로 특정우편국제도는 1946년 6월 30일에 폐지 되었고, 이에 따라 특정우편국장과 그 직원은 그 대로 남게 되었고, 종래의 특정우편국은 보통우편국으로 승격되었다.
정부 수립과 체신부의 탄생
1948년 7월 17일 국회는 정부조직법을 공포하였다. 이 법률에 의하여 11部4處의 행정조직의 대강이 정해졌는데, 정부조직법 중 체신부의 관장사무를 규정한 제25조는 “체신부장관은 우편• 전신•전화•간이보험과 우편저금에 관한 사무를 장리한다.”고 되어 있었다. 동년 8월 4일 초대 체신부장관으로 임명된 제헌국회의원 尹錫龜는 과도정부 체신부장서리 朴尙玉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는데, 업무의 인수가 끝난 것은 9 월 13일이었다.
체신부가 발족한 후 동년 10월 6일 尹錫龜장관은 국회 본회의에서 체신부의 시정방침으로서 ① 통신의 자주권 확립, ② 국내통신사업의 정비 • 확충, ③ 통신사업 관한 기계 • 기구공업의 시급한 창설과 기술진의 양성 연마 등의 3대 기본방침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우편사업의 당면정책으로는 ① 1면1국으로의 현업국 증설, ② 특수 취급과 소포배달 등 사업 내용의 확충을 통한 만민공용통신으로서의 발전, ③ 남북통일의 교량으로서 남북우편물의 매일 1회 교환, ④ 우편요금의 적정한 조정, ⑤ 국제우편의 국제적 진출 등을 내세웠고, 전기통신사업의 당면정책으로는 ① 해외통신망의 완비와 주파수의 획득, ② 전신전화용 물자의 수입계획과 필요 물자의 국내 생산 도모, ③ 전신전화연구기관의 설치, ④ 전파국의 설치와 전기통신의 일원화 등을 내세웠다.
당시에 보고된 체신업무의 현황을 보면, 38 이남의 우체국 수는 623개국으로 3개 면에 1개국 꼴이었으며, 1년간의 취급 물량은 통상우편이 1 억 2,200만통, 소포우편이 31만건이었다. 그 중 전신전화 취급국 수는 527국이었으며 전화 가입자는 38,000여명이었다. 시외전화는 312회선, 전신은 148회선이었는데, 그 중 89회선을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술 • 자재 • 재정 등의 부족으로 선로 및 기계의 보수가 불완전하여 서울의 경우 전 가입자의 20%가 고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부 수립 이전의 체신부의 기구는 6국24과 체제였다.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9월 22일 과 11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개편된 체신부의 기구는 1실4국26과 체제 였다. 즉, 종래의 총무국•우무국•전무국•저금보험국•재정국•자재국의 6국이 비서실•우정국•전무국•보험국•경리국으로 오히려 축소되었던 것이다.
동년 11월 20일에는 電波局을 신설하여 종래에 전무국 무선과에서 담당하여 오던 전파관리업무를 담당케 했다. 이처럼 전파업무의 관장 기관을 신설한 것은 해방 이후 계속된 좌익계열의 간첩행위를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 5월에는 정부기구의 대폭적인 축소안에 따라 전파국이 폐지되고 그 소관업무는 다시 전무국으로 통합되었다.

(사진)1950년 1월 16일에 대전체신청이, 1월 18일에 광주체신청이 각각 개청되었다.
1950년에 들어서는 두 차례의 기구 개편이 있었다. 동년 3월에는 비서실을 폐지하고 비서실 소속의 6개과를 4개과로 줄여 차관 직속으로 하였고, 동년 5월에는 監理局을 신설하는 대신 전파국을 폐지했던 것이다.
1949년 6월에는 尹錫龜장관이 퇴임하고 張基永 장관이 뒤를 이었다. 이어 7월 19일에는 체신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遞信委員會가 설치되어 지방관서의 개편에 착수하여 8월 13일에 地方遞信官署設置法을 공포하게 되었다. 동 법은 체신부장관의 소관 업무를 분장하기 위하여 체신부 장관 소속하에 체신청 • 저금관리국 • 보험관리국 • 전파감시국을 두고, 체신청장 소속하에 우체국•전신국•전화국•전신전화국•국제전신전화국 • 전신전화건설국을 두도록 하였는데, 이 법률에 따라 체신국이 체신청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11월 22일에는 대통령령 제218호로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을 개정하여 대전체신청과 광주체신청을 신설하고, 체신청에 총무과 • 우정과 • 전무과 • 보험과 • 회계과 등 5과를 두었다. 이에 따라 1950년 1월 16일에는 대전체신청이, 1 월 18일에는 광주체신청이 각각 개청되었다. 따라서 1950년부터 체신청이 서울 • 부산 • 대전 • 광주 등 4개청으로 늘어났는데, 각 체신청의 관할 구역은 다음과 같다.
서울체신청 : 서울특별시 • 경기도 • 강원도
부산체신청 : 경상남북도
대전체신청 : 충청남북도
광주체신청 : 전라남북도 • 제주도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