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된장 묵고 장수했는가벼
궂은 날씨다. 바람도 제법 불고 비가 올 듯 말 듯해 젊은 사람이라도 “날씨가 이러니 등허리가 쑤신다”고 농담할 법한. 그래서일까. 장 달이는 냄새가 공기 중에 더욱 자욱하게 퍼진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이내 뽀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는 집이 보인다. 조경자(78세) 할머니 집이다. 인사를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할머니는 없고 며느리 박현순(56세) 씨가 큰 항아리에 장 국물을 우려내고 있다. 55년 전 조경자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박현순 씨는 올해로 30년째 접어든 장 제조기능인이다. 박현순 씨의 나이를 듣고 조금 놀랐다. 많아봤자 40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잠시 외출 중인 할머니를 기다리며 마당을 둘러보는데 세다가 까먹을 양의 항아리가 널따란 마당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고추장, 된장, 청국장이 발효되고 있는 항아리다.
적게는 6개월, 많게는 1년 넘게 숙성시키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은 섬진강 상류에 있는 아미산의 지하 암반수로 담근다. 강천산이 품은 순창은 공기도 좋지만 예로부터 지명이 옥천(玉川)이라 불릴 정도로 물이 맑은 곳으로 유명한 곳. 기름진 토양에서 자란 고추, 콩, 찹쌀을 재료로 삼고, 대를 이은 기술에 정성을 곁들인 것들이다.마을을 다니는 동안 여기 사시는 분들이 젊고 건강하게 사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하니 한결같이 “고추장, 된장 묵고 건강해졌다”고 입을 모으는데, 재료를 알고 나니 안 그럴 수 없겠구나 싶다.
“징허게 맛있는 냄새가 나부러.”
구수한 말투의 조경자 할머니가 등장하는 순간. 며느리 보고 놀란 가슴 시어머니 보고 놀란다는 말도 있던가 싶다. 일흔 여덟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어르신이 봄꽃을 닮은 자켓을 입고 해맑게 웃으며 들어온다. 노랗게 달여진 국물을 보고 “이뿌게 잘 나왔네”라고 덧붙이면서. 스물 둘에 시집와 평생을 장 만드는 데 열정을 쏟은 조 할머니. 냄새만 맡아도 색깔만 봐도 잘 된 장인지 아닌지 가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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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장수마을
순창이 고추장으로 이름나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고 있는 순창 구림면 소재 만일사로 가는 길에 한 농가에서 점심 때 먹은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하다가 후일 왕이 된 후 궁중에 진상토록 했다는 것이 유래. 영조대(代)의 ‘수문사설’과 ‘규합총서’에도 순창고추장을 특산품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 제조방법 또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덕분에 이 마을에는 4대째 가업을 이어 받아 지금에 이른 집 등 54가구가 이웃해 있다.
순창 하면 고추장이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을지 몰라도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전라북도에 소속돼 있지만 남도와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인근에 임실, 광주, 담양이 자리해 있다. 1993년에는 순창이 재발견 된 일도 있었다. 타임지에서 순창을 세계 장수마을로 소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100세 이상 주민 수가 10만 명당 28명으로 집계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순창이 해발 300m의 노령산맥 기슭에 자리해 온화한 기온과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등 쾌적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것을 장수마을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꼽았다.
중간산 지대에 위치해 주민들의 이동에 따른 운동량이 많고, 고추장, 된장 같은 전통 발효식품을 먹는 것 역시 오래 사는 비결의 하나로 분석했다. 문득 무병장수하고 싶으면 이곳 순창에 터를 잡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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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밥상과 쉬지 않는 움직임
“장 달이나벼~”
조경자 할머니 집에 친구가 마실을 왔다. 이웃에 사는 김경순 할머니(80)다. 장 달이는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 김경순 할머니는 조경자 할머니와 60년지기 친구다. 두 할머니는 이 마을에 시집 온 시기도 연배도 비슷하다. 이웃이라기보다는 가족같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항아리에 가득 담긴 장 국물을 손가락으로 쿡 찍어 맛을 본다. “잘 되었구만!”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한다는 김경순 할머니에게도 재차 나이를 확인한다. “정말 여든 맞으시냐”고. 목에 두른 분홍색 스카프를 닮은 수줍은 할머니의 미소를 보니 영락없는 소녀다.
“특별히 뭐 먹는 게 있간, 여기 이 장아찌허고, 된장국허고만 있음 되지.”
김 할머니가 먹는 세 끼 식단을 물으니 건강비결이 궁금한 것인지를 눈치 챈 조 할머니가 옆에서 거든다. “자꾸 움직여야 해. 젊었을 때는 무거운 항아리도 번쩍번쩍 들고 그랬어. 커다란 다라도 번쩍번쩍 들고. 지금도 장아찌 버무리는 건 내가 허지. 암만.”
고추장, 된장, 청국장이 있는 항아리 옆엔 종류별 장아찌가 자리해 있다. 보기만 해도 밥 한 그릇은 뚝딱 해치울 수 있을 만큼 먹음직스럽다. 어릴 때 밥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면 어른들은 그랬다. “입맛 없을 때 물에 밥 말아서 장아찌 하나 놓고 먹어봐. 맛있어.” 고들빼기장아찌, 마늘쫑장아찌, 무장아찌, 매실장아찌, 고추장아찌…… 다시금 향수에 젖으며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요즘 두 어르신 사이의 화제는 새끼를 배 토실토실한 금붕어다. 옛날에는 콩을 찧었을 절구통이 금붕어 집이 됐다. 알을 낳으라고 조 할머니가 잠시 옮겨 준 것. 어느 날 김 할머니에게 금붕어 존재를 말했더니 김 할머니도 궁금해서 올 때마다 확인한단다. 그리고는 물고기 이야기를 마치 손자 이야기하듯 도란도란 나누는 거다. 장 국물의 색깔을 보고, 냄새를 맡을 때의 표정에선 볼 수 없던 또 다른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울 때야 배 안 곯고 안 아픈 걸 최고로 쳤지만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화두인 시대다. 하지만 욕심은 품으면 품을수록 커지는 법. 여기, 욕심을 덜어내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두 할머니를 보니 건강비결을 물으러 간 것조차 무색해진다.장이 익어 가는 마을, 순창에는 두 할머니 같이 건강한 삶을 사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건강한 삶이 푹푹 숙성되고 있다. ![](/upload/logo_r[670][706].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