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전문 PD, 세계를 가다
세계여행을 꿈꾸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 탁재형 PD. 그는 ‘오지 전문 PD’란 수식어가 붙을 만큼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보통의 여행자가 많이 다니는 대로(大路)가 아닌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험준한 숲길에 땀내 나는 발자국을 찍어온 것이다.
“지난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프라임 - 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어요. 약 15년간 50개국이 넘는 나라를 누비며 많은 곳을 보고 느끼고 또 배웠습니다. 처음부터 오지만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잘 가지 않고 또 알려지지 않는 곳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지 전문’이란 수식어가 붙었죠.”
어릴 적부터 막연히 외국을 동경했던 그는 신문·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면 해외에 나갈 기회가 많을 것 같아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고려대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며 학교 방송 동아리 ‘KUTV’에 들어가 부지런히 영상을 찍고 편집을 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교내의 굵직굵직한 행사를 도맡아 촬영하며 실전처럼 실력을 쌓고 감을 익혔다.
“제가 학군단(ROTC)을 나왔는데 당시 자신의 미래 모습을 종이에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린 그림이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조연출과 조수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그림이었죠. 졸업 후 외주 프로덕션에 들어갔는데 정말 그 그림과 똑같은 거 있죠. 다큐멘터리 업계에서 살아있는 역사로 손꼽히는 김석원 PD님 밑에서 정말 박박 기면서, 제대로 일을 배웠습니다.”
재미에서 재미로 JUMP!
온 세상, 온갖 길을 누벼온 약 15년간의 시간을 어찌 이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 있을까. ‘돈 벌며 여행하니 좋겠다’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 일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출장’에 가까웠다.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정보도 없는 곳곳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노동의 터전이 사무실이 아니라 해외였다는 게 다를 뿐. 그럼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재미있는 일’로 기억한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이끄는 ‘동기’를 갖고 있잖아요. 저는 그게 ‘재미’예요. 어떻게 재미만 좇아 사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 그동안 재미에 취해 살아왔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느라 정작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전 사람들이 좀 더 뻔뻔해졌으면 좋겠어요.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며 살았으면 해요. 저 역시 머나먼 길 위에서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영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지금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를 운영하며, 책을 내고, 강연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재미있는 일’ 에서 ‘새로운 재미있는 일’로 점프했다고 할까요?”
작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한 탁재형 PD는 오지 곳곳을 누볐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 지금은 재미의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있다. 여행지의 문화부터 정보, 실질적인 조언까지를 총망라한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는 여행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여행 상품을 직접 기획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뿐인가. 지난 5월엔 ‘스피릿 학술회 2015’라는 독특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
“스피릿 학술회는 술을 정말 좋아하는 이들의 모임이에요. 다양한 술을 시음하며 그 술에 얽힌 이야기부터 유래, 특징 등을 공유하는 학술적이면서도 유쾌한 술판이죠.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잖아요.”
지난 2013년 세계 각국의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스피릿 로드’란 책을 내기도 한 탁재형 PD는 ‘술은 테이블에 앉은 채 떠날 수 있는 여행’이라 덧붙인다. 해외 취재와 여행 중에 그가 맛본 수많은 술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때로는 술을 마시던 그 순간의 공기와 사람,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떠올라 목울대를 적시기도 한다. 술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세계다.
여행지에서 취향을 발견하다
흔히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PD이자 오지 전문 PD로, 때로는 여행 프로그램의 패널이자 리포터로 전세계를 누빈 탁재형 PD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여행은 ‘나의 취향’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여행지의 낯설고도 신선한 환경을 마주하면, 내가 무얼 좋아하고 어떤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더욱 또렷이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전 해외에 나가면 꼭 사오는 세 가지 아이템이 있어요. 그 나라의 술과 음반 그리고 소스죠. 여행지에서 가져온 음반을 틀어 놓고, 그 나라의 소스로 음식을 만들어 술 한 잔을 곁들이는 것. 뻔한 일상을 행복하게 하는 즐거움이요, 더 나은 일상을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되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탁재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를 물었다. 조금은 무거울 법한 질문이지만 그는 약간의 침묵 끝에 크게 숨 한번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온갖 재미를, 즐거움을 유통한 사람. 저는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탁재형 PD가 있어 우리의 뻔한 일상이 좀 더 재미있어지지 않았던가. 그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은 그 자신이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재미를 열어주는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부디 앞으로도 그가 팟캐스트로, 책과 강연으로 우리에게 재미있는 에너지를 팍팍 불어넣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