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이란 날.개.를 달.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 아, 이것마저 없다면’. 안도현 시인은 ‘퇴근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복잡다단한 하루를 마치고 동료와 기울이는 소주 한잔, 삼겹살 한점엔 삶을 위로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지 않은가. 작년엔 삼겹살과 소주 콤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추가됐다. 연애하느라 바쁜 ‘재벌 2세 실장님’ 이아닌 매일 아침 빨간 토끼눈으로 출근하는 ‘월급쟁이’를 담은 드라마는 직장인의 마음을 매만졌다. 특히 축 처진 어깨와 애잔한 눈빛으로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낸 박대리 캐릭터를 일컬어 ‘내 아버지의, 내 형의, 동료의 그리고 나의 이야기’라 공감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늘 ‘사람 좋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치이기만 하던 박대리의 등에서 하얗고 당당한 날개가 돋아났을 때 모두가 한순간 울컥해진 것은.
“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어요. 비록 편집되기는 했지만 ‘장그래, 넌 내게 날개를 달아준 녀석이야’라고 말하는 대사죠. 그 대사처럼 <미생>은 저에게 진짜 날개를 달아준 작품입니다. 박대리는 지금까지 제가 해 왔던 역할 중 가장 큰 역할이에요. 또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던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최귀화는 <미생>을 통해 재발견된 배우다. 드라마 <제중원>을 비롯해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해무>, <마담 뺑덕> 등에서 주로 단역과 조연을 맡아 긴 무명시절을 보낸 그는 ‘박대리’로 시청자의 마음을 훔쳤고 ‘최귀화’라는 이름을 알렸다.
나의 동력은 즐.거.움
1997년 최귀화는 연극 ‘종이연’으로 데뷔했다. 데뷔라고 말은 했지만 특별히 생활이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그저 ‘늘 극단에 있었다’고 말한다.
“극단에서 연기도 하고, 대본도 쓰고, 무대도 꾸몄어요. 오래된 극단이라 책이 많아서 책도 읽고, 청소도 하고, 선배들 밥도 준비했고요. 별로 말이 없는 편이라 극단에서도 별명이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였을 정도였죠.”
이야기 끝에 최귀화가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특별히 대단한 연기를 한 것도, 그렇다고 돈을 번 것도 아니지만 그저 재미있고 즐거웠노라 덤덤하게 회상한다. 사실 그는 ‘언제나 IMF’라고 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무대에 조명을 다는 일부터 전단지 붙이기, 휴대폰 케이스 만들기, 명함이나 달력의 오더를 따내는 일까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온 나라가 IMF 여파에 휩쓸렸던 90년대 말에도 그는 전혀 IMF를 느끼지 못했다. 연극에 관객 수가 더 적어진 것을 빼면, 그의 삶은 언제나 IMF였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이 힘든 무명시절을 어떻게 버텼냐고 물어봅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버틴 게 됐긴 했지만, 사실 저는 경제적인 부분과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다음엔 어떤 작품을 하게 될까’란 생각을 항상 했죠. 물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커가며 더 힘들어지긴 했어요. <미생> 박대리가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듯, 저도 배우로 사는 삶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을 절실하게 했죠. 이번 달 생활비, 아이 학원비는 어떻게 하나 걱정도 많이 했고요.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박대리처럼 무시당하는 일도 꽤 있었는데, 그래서 박대리에게 정말 공감하며 연기할 수 있었어요.”
20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연기를 하면서 생활의 추를 간신히 맞춰가야 했기에 고되고 힘든 나날도 많았다. 지난해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를 찍고 나서는 지하철 역 안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때론 아내에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며 농담 아닌 농담도 했다. 그럼에도 최귀화는 ‘즐거움이 나의 동력’이라 강조한다. 진정으로 연기가 즐겁고 재미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노라고.
과정 없이결.과.도 없.다.
“얼마 전에 혼자 경주 여행을 다녀왔어요. 노트북 하나 들고 태어나 처음 경주 땅을 밟아봤죠. 게스트하우스 8인실에 묵었는데 여기가 또 신세계였습니다. 저녁마다 여행자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들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이상하게 편안하고 좋았어요.”
그는 경주에서 글을 꽤 썼노라 이야기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최귀화는 오랫동안 혼자 글을 써왔다고 했다. 일과 중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일을 묻는 질문에 ‘글쓰기’라고 답했을 정도다. 아주 어릴 땐 희곡을 썼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후부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특별히 잘 된 작품은 없는데, 오래는 썼어요. 집에 있을 땐 항상 노트북을 켜둡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 쓸 수 있도록 말이죠.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갈 때도 있고요. 저는 무슨 일이든 단번에 이뤄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과정 없이 결과가 올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감당이 안 되지 않을까요? 제가 걸어간 만큼,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최귀화는 소처럼 우직한 배우다. 연기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모습도 그렇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10년 전의 최귀화에게 그리고 10년 후의 최귀화에게 전하는 편지’를 부탁했다. 한동안 담담히 생각에 잠겨있던 이 배우는 나지막이 입을 열어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읊었다.
“10년 전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잘 버텨왔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묵묵히, 쉬지 말고 버티라고. 10년 후의 저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미생>에도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 최귀화가 말한다. 즐겁게 버티며, 하루하루 땀으로 과정을 만들어가는 이가 하는 말이니 귀담아들을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