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유언장을 작성하며 삶을 돌아보다
아침저녁으로 완연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10월 중순, 용인의 한 카페에서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 표창원 소장을 만났다. 약속시간 3분 전, 깔끔한 검은 색 정장을 입은 표창원 소장이 카페에 들어섰다. 방송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표창원 소장의 날카로운 눈매와 중저음의 목소리는 주위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취재진과 차분히 인사를 나눈 그는 메뉴판을 들고 온 점원에게 ‘딸기요거트주스’를 주문했다. 표창원 소장과 딸기요거트주스라니, 그 예상치 못한 조합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나 냉철하고 정확할 것 같은 지금의 모습 뒤에 ‘셜록 홈스’를 꿈꾸며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닌 어린 시절의 꼬마가 슬며시 겹쳐보였다.
요즘 표창원 소장은 그 누구보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 소장으로 범죄에 대한 연구와 사건 분석은 물론 학생들을 위한 ‘CSI/프로파일링 체험전’ 등의 교육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다. 또 올해에만 어린이들을 위한 탐정 추리소설인 <설록의 사건일지>와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은 <왜 나는 범죄를 공부하는가> 이렇게 2권의 책을 펴냈다. 그뿐인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한 여러 방송/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범죄수사를 분석하고 자문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최근엔 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상유언장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 삶이라는 여행을 마친다. 많은 보람과 긍지와 기쁨을 맛본 행복한 삶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삶의 의미와 참다운 기쁨을 알게 해 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맙다. 나의 모든 재산은 형편이 어려워 꿈을 향한 도전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모두 기증한다’는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그의 유언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사실 ‘나라면 유언장을 어떻게 쓸까’하고 단편적으로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상 유언장을 쓰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겐 스스로 늘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경구가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지요. ‘당신이 태어날 때 혼자 울었고 주위 다른 모두가 미소 지었듯,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 혼자 미소 짓고 주위 다른 모두가 눈물짓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이런 삶이 정말 인간다운 삶 아닐까요?” 가상 유언장을 쓰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다시금 되새겼다는 표창원 소장. 그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이유다.
뼈저리게 깨달은 신뢰의 힘
표창원 소장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다. 경찰대학을 졸업한 후 경기도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으며, 1997년 영국의 엑시터 대학교에서 경찰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로 활동하다 2001년 경찰대 교수로 임용, 2012년까지 재직했다. 퇴직 이후 2014년 표창원범죄과학연구
소를 설립한 그는 민간 프로파일러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저의 삶 자체, 제가 먹고 사는 바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신뢰’란 단어를 꼽을
수 있습니다. 경찰관으로 재직할 때도 단 한 번도 청탁을 받아들인 적이 없고, 프로파일로서 피의자 면담조사를 할 때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백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실수를 할 때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특정인의 이익을 위한 일은 하지 않아요. 제가 만약 신뢰의 가치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표창원 소장은 경험으로 신뢰의 힘을 뼈저리게 깨달았노라 덧붙였다. 그가 경찰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외국어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학교축제를 맞아 ‘모의 인터폴 총회’를 개최했다. 동아리 회장이었던 그는 여러 외국대사관 공관을 찾아 상황을 설명한 후 그 나라의 전통의상을 빌렸다.
“문제는 그 전통의상들을 반납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어요. 양손에 가득 외국 전통의상을 들고 여러 공관들을 돌아다니다가 그만 제 경찰대학 제복을 분실하고 만 것이지요. 고민 끝에 저는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고, 여벌 제복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대학 명예위원회에서 절 호출했습니다. 명예위원 선배들은 제복을 분실했는지의 여부를 물었고, 저는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며 거짓말을 했죠. 알고 보니 제가 잃어버린 제복이 고양경찰서에 익명으로 전달되었고, 고양경찰서에서 경찰대학에 공식 통보를 해왔던 거였어요. 그간의 모범적인 생활을 감안해 ‘퇴교’가 아닌 ‘징벌방 근신 3주’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후회와 반성, 수치심과 자책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죠.” 표창원 소장은 징벌방에 있던 3주 내내 뼈저린 반성을 했다. ‘앞으로 절대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자. 신뢰를 잃으니 차라리 손해를 보거나 비난을 받는 게 낫다. 신뢰의 가치를 지키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신뢰의 가치를 지켜갈 것
경찰관으로 그리고 프로파일러로 그동안 표창원 소장은 수많은 범죄사건을 조사하고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해왔다. 최근엔 사회적으로 여러 갈등이 폭발하며 무섭고 끔찍한 강력범죄도 잇따르고 있다. 연달아 범죄사건을 분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저도 참혹한 사건사고를 분석하며 분노를 느낄 때도 있고, 인간 전체에 대한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악독한 범죄자라해도 차분히 끈질기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면 깊은 곳에 ‘나도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그들도 삶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배려 받고, 기대를 받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죠.” 이야기 끝에 표창원 소장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부모님의 잦은 불화는 어린 표창원 소장의 마음에 분노와 반항심을 키웠다. 그는 툭하면 친구들과 싸우며 각종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제 안엔 분노와 이기심, 욕심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저를 보듬어준 많은 분들이 있었어요. 매일 준비물을 챙겨가지 않아 벌을 섰던 저를 위해 여분의 준비물을 챙겨줬던 친구, 혼자 서럽게 울고 있을 때 따뜻하게 안아주신 친구 부모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 가겟집 아주머니 등이 제가 가진 부정적인 면을 다스릴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선’과 ‘선의’가 있고, 아무리 분노가 일어도 그 ‘선’의 세계를 침범해선 안 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신 거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선’의 세계를 지켜가고픈 마음. 이것이야 말로 ‘표창원’이란 한 사람을 구성하는 뿌리 깊은 지표가 아닐까.
출간 도서
『왜 나는 범죄를 공부하는가』(다산북스 펴냄)이 책은 프로파일러의 경험을 주로 쓴 기존의 책들과 달리 셜록 홈스를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표창원 박사 자신의 공부 인생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다. 표창원 박사는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짧은 인생 동안 모든 것을 이루고 그 끝을 보겠다는 오만을 오래전에 버렸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공부한다”라고 말한다. 범죄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에게 세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불현듯 삶이라는 경주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삶에 깊이를 더해줄 자극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언제 어디서든 두려움 없이 공부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표창원 박사의 삶이 당신에게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고 밀고 나아갈 용기를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