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절기
우리는 24절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24절기를 일일이 대라고 할 때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므로 우선 24개 절기에 어떤 것이 있는지부터 알아본다.
♦ 봄 (음력 1·2·3월) :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 (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 여름(음력 4·5·6월) :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 (芒種), 하지(夏至), 소서(小署), 대서(大暑)
♦ 가을(음력 7·8·9월) :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 (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 겨울(음력 10·11·12월) :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이와 같이 정리해 보니 24절기는 사계절에 6개씩, 각 달에는 두 개씩 배당돼 있다. 절기 개념을 좀 더 정확히 쓰면 24절기의 절기란 원래는 절기(節氣)와 중기(中氣)의 합친 말로서 12절기와 12중기로 나뉜다. 그리고 12개의 절기는 월초에, 12개의 중기는 월중에 들어 있다. 예컨대, 입춘은 1월의 절기이고 우수는 1월의 중기이다. 여기서 기(氣)란 5일을 1후(候)라고 했을 때 3후, 즉 15일을 말한다. 현행대로 태양력에 따르면 절기는 매월 4~8일에 있게 되고, 중기는 매월 하순에 있게 된다. 그런데 앞의 분류는 음력을 기준으로 배치한 것으로, 계절의 변화는 태양이 주도하기 때문에 정확히 맞지 않는다. 입춘이 음력 12월말에 오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나눠 놓은 절기를 음력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윤달(閏月)을 넣어 계절에 맞게 조정 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음력 달에서 중기가 빠진 달이 생기면 그 달을 윤달로 하면 된다.
명절과 절기
우리에게는 유두(流頭)나 한가위 추석과 같은 중국에 없는 고유 명절이 있다. 추석은 사명일(四名日)이라고 해 대표적인 명절에 들어가는데 나머지는 설, 한식, 단오로 모두 24절기가 아닌 음력 명절이다. 한식 대신 음력 9월 9일의 중양(重陽)이나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이 네 명절은 각각의 계절을 대표하며 이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명절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상원(上元)·중원(中元)·하원(下元)은 각각 1월과 7월과 10월의 보름을 말한다. 상원, 즉 정월 대보름에는 전국 어디를 가나 농민들의 축제를 볼 수 있다. 중원의 경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불교의 우란분재나 김매기를 끝낸 농민들의 백중놀이가 벌어지는 때다. 상원에 등을 달고 한식 때 반선(伴仙), 즉 그네를 뛰는 중국과 달리 우리는 사월 초파일 때 등석(燈夕)을 하고 단오 때 그네를 뛴다. 이는 양국의 기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데, 음력 4월 8일을 부처님 탄생일로 보는 우리 식 해석도 작용한 것 같다.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절, 그리고 구구절 또는 중양절처럼 양수인 홀수가 겹치는 날을 명절로 삼는 것도 그 근본을 도교에 두고 있다.
농가월령가
때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면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24절기를 따라야 한다. 음력을 사용하던 전통 사회에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정치가 갖는 근본이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의 절(節)을 세우는 것이라는 국왕의 거창한 뜻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실질적으로는 농민들에게 태양력을 반영하는 절기를 주지시키는 데 있었다.
예컨대, 망종은 음력 5월의 절기로 양력으로는 6월 6일경 인데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때라는 뜻으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모내기를 해야 하므로 '발등에 오줌 싼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일년 중 가장 바쁜 때다.
하지는 남쪽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모내기의 마지노선으로 삼아 이때가 돼도 비가 오지 않아 모를 심지 못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되는데,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이때쯤이다.
하선동력(夏扇冬曆)
부채는 '겨울에도 쥐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조선 풍속의 일각을 이뤘으며, 계층을 막론하고 그에 대한 기호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당색으로 사분 오열된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조선 후기 서울에서는 적대적 관계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날 것에 대비해 얼굴 가리개 용도로 부채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단오절에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의 감사와 통제사가 공조(工曹)를 통해 진상한 절선은 관례에 따라 임금이 조정의 대신들과 궁중의 시종들에게 선사하고, 이것은 다시 그들의 친척과 친우들에게 선사된다. 부채를 만드는 고을의 수령들도 역시 임금에게 진상하고 친우들에게 선사한다.
도애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부채 중에 매우 큰 것은 대나무로 된 흰 살이 40개 내지 50개나 된다. 이것을 백첩선(白貼扇) 이라고 하고, 옻칠을 한 것을 칠첩선(漆貼扇)이라고 한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금강산 1만 2천 봉을 그린다. 혹 광대나 무당들이 이것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는 부채에다 꺾은 가지·복사꽃·연꽃·나비·은붕어·해오라기 등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고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갖가지 액세서리로 치장한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과거 조상들의 부채 사치를 연상케 한다.
조선 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관청에서 동지에 맞춰 임금에게 달력을 만들어 올렸다. 새 달력이 나오면 관리들은 이를 본으로 만든 달력을 서로 나누는 풍속이 있었다. 달력을 돌리는 일은 아전들이 주로 했는데, 이들이 무슨 돈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새로 벼슬살이하는 집으로부터 받은 당참전(堂參錢), 즉 필요한 서류를 꾸며준 대가로 받은 수고비로 달력을 구입해 그 집에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선동력(夏扇冬曆)', 즉 단오에는 관리가 아전에게 부채를, 동지에는 아전이 관리에게 달력을 준다는 말이 생겼다.
'동지 팥죽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오랜 과거부터 동지를 설로 여겼던 관습이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동지를 아세(亞歲 : 설날 버금간다는 뜻)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이 날 이후부터는 그 동안 기승을 부리던 음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반대로 양의 세력은 점점 커져 만물이 생동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고대부터 이 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던 것이다. 동지가 음력으로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동짓달이 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알심, 옹시미, 옹실내미 등으로 부른다. 이 새알심은 나이 수만큼 아이들에게 먹인다. 그러나 애동지에는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해 팥죽을 쑤지 않고 대신 팥떡을 해먹는다.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또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나 대체로 아이의 건강과 운세를 염두에 둔 말이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놓아 차례를 지낸 다음 방·마루·광 또는 부엌에서 불을 관장하는 신인 조왕신에게 한 그릇씩 떠다 놓으며, 대문이나 벽에는 조금씩 뿌린다. 이렇게 하는 것은 팥죽의 붉은 색이 귀신이 두려 워하는 색으로, 액을 막고 잡귀를 없애 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팥죽을 동네에 있는 고목에도 뿌리는데, 이것도 역시 팥의 붉은 색이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