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집배원 소재 만화 〈빨간 자전거〉의 김동화 화백
낯선 곳 같지만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조금만 달리면 닿을 것 같은 곳, 임하면 향기리. 그 곳에서 빨간 자전거에 우편물을 하나 가득 싣고 '배추밭에 꽃 심은 집' '새가 쉬어 가는 집' 등 누구나 갸우뚱할 만한 주소를 잘도 찾아가는 집배원이 있다. 휴대폰과 전화가 그 역할을 대신한 텅 빈 우체통을 보며 아쉬워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산소에 들러 하루의 일과를 전하는 할아버지를 눈물겨워 하는 가슴 따뜻한 집배원이 등장하는 만화 〈빨간 자전거〉.
〈목마의 시〉 〈요정 핑크〉 〈황토빛 이야기〉 등의 탐미적인 작품으로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폭넓은 독자들을 확보해온 김동화(53세) 화백이 조선일보에 집배원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빨간 자전거〉를 연재해 잔 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에 편지를 받아본 기억이 있나요?
'어려서부터 집배원은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존재였어요. 어떻게 마음을 전할까 고민하며, 그러다가 어렵게 펜을 들어 몇 번이나 되고친 편지를 우체통에 넣은 뒤 답장을 기다리기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리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처럼 휴대폰과 이메일로 너무나 통신이 빨라진 세상에서도 사람 사이의 만남을 이어주는 집배원은 여전히 가슴 설레는 손님입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집배원을 보면 멀리 있는 그리운 이의 편지를 전해줄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설렌다는 김동화 화백이 집배원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3년 전 프랑스 만화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돌아오면서 만화의 고급화·세계화와 함께 이웃 나라인 일본과 달리 독자층이 편협한 만화 시장을 넓혀 보겠다며, 오래 전부터 가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구상해 왔다는 김동화 화백. 김 화백의 오랜 구상 끝에 태어난 '빨간 자전거를 탄 젊은 집배 원'에 대한 독자들의 인기는 대단하다.
'오래 전부터 제 만화를 즐겨본 청장년층 독자들은 물론이고 일본 만화의 자극에 익숙해진 20대들도 〈빨간 자전거〉를 좋아합니다. 특히 자녀의 도움으로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6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옛 시절을 추억하게 해 줘 고맙다며 정성스럽게 쓴 이메일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죠.'
앞만 보고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 감동이 사라진 시대에 김 화백의 〈빨간 자전거〉가 던지는 메시지는 자못 의미 심장하다.
줄곧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김 화백의 작품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주택가 한가운데에 마치 자신이 그려 왔던 순정 만화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새하얀 3층집에서 자신의 꿈을 그려 가는 김 화백. 1975년 한국일보에 〈나의 항공〉이라는 만화로 데뷔한 그는 현대사의 격랑기 였던 1980년대에 소년 시절을 보낸 젊은이들에게는 〈요정 핑크〉와 〈곤충소년〉으로 잘 알려졌다. 그의 대표작인 〈곤충소년〉에는 초등학교를 남들보다 빨리 입학한 탓에 체구가 작아 동급생들의 심부름을 도맡았던 김 화백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시절엔 지금은 보기 힘든 장수하늘소나 풍뎅이 같은 곤충들이 참 많았어요.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풀숲에서 숨쉬고 있는 곤충들을 바라보며 내가 곤충과 같은 힘을 가지면 좋을 텐데 하는 상상을 했죠. 그렇게 그려 나간 〈곤충소년〉은 바로 제 어린 날의 얘기랍니다.'
강낭콩에서 솟아 나오는 요정의 모습을 그린 〈요정 핑크〉, 어린 시절 고향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을 담아낸 〈황토빛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김 화백은 탐미적이고 섬세한 선으로 유명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틈나는 대로 서울 주변의 한 적한 시골들을 카메라에 담아 오는데, 그 정경들은 김 화백의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빨간 자전거〉에 담긴 가상의 마을도 우리 주변에서 공해로 더렵혀진 개울물과 주택 사이로 거미집처럼 드리워진 전깃줄만 지워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김 화백은 그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집배원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
만화를 함께 그리는 아내 한승원씨와의 사이에 남매를 둔 김 화백은 지난해 12월, 연재 40회를 맞은 〈빨간 자전거〉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또 하나의 자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만화를 더 고급화해 보자는 취지에서 한국 만화책으로는 최초로 올 컬러 하드 커버로 단행본을 만들어 봤습니다. 한 장 한 장씩 넘겨보면 아쉬운 부분만 눈에 들어오지만 그마저도 제게는 참 소중하죠. 〈빨간 자전거〉는 인터넷에서도 무료로 쉽게 볼 수 있지만, 제 만화를 소장하려는 팬들 덕분에 단행본의 인기가 좋아 아주 기쁩니다.'
아직도 〈빨간 자전거〉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김 화백. 순정 만화와 수준 높은 토속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 왔던 그는 오늘도 집배원과 함께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편지는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고 보면 집배원들이 참 부러워요.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달해 주는 직업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