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취계의 자존심을 지키게 되어 기뻐요'
우리 나라 우취계에 경사가 생겼다. 지난 8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차이나 '99세계우표전시회'에서 우리나라 원로 우취인인 이종구씨의 작품 「구한국우표(1884~1905)」가 명예 그랑프리(대상)를 차지했던 것이다. 세계우표전시회에서의 명예 그랑프리 수상은 우리 우취사상 처음 있는 일로 우리 우취계를 빛낸 역사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종구씨
명예 그랑프리는 챔피온급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엄정한 심사를 거쳐 1명을 선정하는데, 챔피온급에의 출품 자격은 지난 10년 동안 국제우취연합(FIP)이 후원하는 세계 우표전시회에서 3회 이상 대금상(95점 이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번에 그랑프리를 따낸 이종구씨의 작품 「구한국우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와 구한국시대의 우편제도를 관련 자료를 가지고 설명 한 것으로 이 작품을 구성한 구한국시대의 각종 우표와 명판, 시트, 그리고 실체봉투는 국보급 자료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수상은 국보급 우취 자료를 통해 한국의 우표 문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명예 그랑프리 수상자인 이종구씨는 부산우취회 소속으로 1965년부터 10여년 동안 부산우취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국내외에서 개최된 각종 우표전시회에서 60회 이상 참여한 화려한 출품 경력을 지니고 있다. 즉, 1975년부터 국내 우표전시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전국 우표전시회에서 10 회, 아시아 우표전시회에서 7회, 세계우표전시회에서 27회 입상한 바 있다. 또한 각종 국내외 우표 전시회에 찬조 출품을 하기도 했다. 세계우표전시회에서 대금상 이상을 수상한 경력만 해도 인도세계우표전(1989년) 이후 7회나 된다.
1991년부터 3년 동안 세계우표전시회에 커미셔너로 활약했으며, 현재 영국 왕실우취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예 그랑프리 수상자 이종구씨를 만나 그랑프리 수상의 의미, 작품을 준비했던 과정, 한국 우취계가 안고 있는 과제 등을 이야기해 본다.
한국이 UPU에 가입하기 전에 발송된 한국과 일본의 우표가 각각 붙은 실체봉피.
10푼 우표는 대구에서 동래까지의 국내용 우표이고
10센 우표는 부산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일본 우표이다.
- 우리나라 우표수집가가 세계우표전시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로 수상자 개인적인 영광일 뿐 아니라 국가적인 영광이라 하겠는데,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우선 개인적으로 기쁘고, 한국 우취계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우리가 1984년과 1994년에 두 차례나 많은 예산을 들여 세계 우표전시회를 개최했고, 따지고 보면 그것이 수집가들의 잔치인데, 수집가들이 보답을 하지 못했던 데 대해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수집가로서 체면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자부심이 듭니다.”
-명예 그랑프리는 챔피온급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 선정하고, 챔피온급에의 출품 자격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우표전 시회에서 3회 이상 대금상을 수상한 작품에만 주어지는데, 그 동안 그랑프리에 도전하기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내셔널 그랑프리나 인터내셔널 그랑프리는 대금상을 두번 따고 세번째 도전해야 합니다. 세번째 출품해서 상을 못타면 그 작품에는 자격 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대금상을 딴 사람이 두어분밖에 안 됐어요. 국가에서는 한없이 밀어주는데, 우리 수집가들은 한번도 보답을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국제전에도 여러 번 참가해서 남들이 그랑프리 따는 것을 구경도 했죠.
이제 우표 수집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게 되었는데, 이 기분을 다른 수집가들에게 전달해서, 우리도 열심히 하면 그랑프리도 딸 수 있다는 의욕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 그랑프리 수상작인 「구한국우표(1884~ 1905)」는 어떤 작품입니까, 그 특징이랄까 자랑 거리를 설명해 주시죠.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는 1884년 갑신정변 때 5문과 10문 두 종이 먼저 나왔어요. 인쇄를 일본에 의뢰했는데, 한성내에서 사용하게 되는 우표는 5문이고 제물포와 한성간에 오가는 우표는 10문이었어요. 나머지 25문, 50문, 100문 우표는 국제우편용으로 쓰기 위해 주문했던 겁니다. 우리나라가 UPU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우표는 아니었죠. 그러니까 갑신년 10월 1일에 사용하기 위해 들여온 우표가 5문과 10문 우표인데,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정총국 개국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견된 실체봉투가 한 통도 없어요. 그 당시 양반가에서는 하인을 몇명씩 두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보낼 일이 있으면 하인을 보내지 우체국을 이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체봉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나오기를 갈 망하면서 추적도 많이 했는데, 불행하게도 아직 까지 문위우표의 실체봉투는 한 통도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우표 위에 도장을 찍은 사용제 우표는 10장 가까이 발견됐어요.”
대한가쇄우표 5푼 우표에 1899 년 7월 17 일 한성우체국 발송인이,
한 돈 우표에 7월 20일 공주우체국 도착인이 찍혀 있다.
-실체봉투는 나타나지 않는데, 사용제 우표만 나타났다면 가짜일 가능성은 없나요?
“그 문제가 이번에 그랑프리를 타는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어요. 그 당시에 사용했던 도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가짜라는 증명도 없고 진짜라는 증명도 없어요.
당시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우정총국에서 10월 1일 개국을 하오니 많이 이용해 달라고 윤치호 주미공사에게 보낸 개업 인사식 문서가 하나 있고, 언더우드 부인의 「한국의 생활 15년」이라는 책자에는 겨우 우체국을 개국 했는데, 불이 나서 도장마저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탄 것은 우정총국이 아니고 옆에 있는 초가집이었으므로 그 기록도 미덥지 않습니다.
문위우표에 이어 발행된 우표가 1895년 6월 1일에 발행된 태극우표죠. 태극우표는 미국에서 인쇄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발주 근거가 없습니다. 그 당시 미국 세력이 강했으니까 주문을 받은 무역회사에서 미국 공사에게 부탁해서 미국으로 발주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1890년대에 들어와 서는 화폐 단위가 푼에서 전으로 바뀝니다. 푼일 때는 5푼, 1돈, 2돈 반, 5돈으로 4종의 우표가 나왔는데, 거기다 먹판으로 가쇄를 했어요. 그 중에는 자를 가쇄한 우표는 많지만 錢자를 가쇄한 우표는 매우 귀했어요. 다행히 일본의 미즈하라라는 수집가가 42매 남은 전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분이 사후에 유언을 통해 제게 넘겨 줬어요.
이화우표는 1900년 통신원 인쇄국에서 찍어 냈는데, 나중에는 전환국에서 돈과 함께 찍어냈죠. 우리 나라 사람이 도안을 했었죠.
이처럼 문위우표의 명판과 천공, 태극우표의 초판과 재판의 구분, 1895년 6월 1일 한성과 인천에서 쓰던 도장, 이화우표의 소인, 그러한 우표들의 천공, 지질, 인쇄방식에 따른 구분, 그런 것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총 8틀에 128리프로 꾸몄는데, 그 중 95%가 외국에서 들여온 겁니다. 외국의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국제경매 등을 통해 입수한 거죠.”
- 작품 준비를 하다 보면 원하는 우표류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텐데,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실질적인 애로는 어떤 점입니까?
"요즘은 해외에 나갈 때 1만불까지 허용이 되지만, 전에는 100불이었어요. 그 돈 가지고는 해외에 나가 우표를 살 방법이 없었어요. 그게 가장 큰 애로였죠. 그러니까 우표를 사기 전에 송금 방법부터 연구해야 했어요. 요즘은 우표도 문화재라 해서 어느 정도 송금이 허용된다지만, 전에는 지불 방법이 문제였어요.
또 탐나는 우표가 있는데,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는데, 억만금을 줘도 안판다는 겁니다. 그럴 때 제가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했지요.
일반적으로 우표 수집가는 세가지 요소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돈이 있어야 되고, 둘째는 시간이 있어야 되고, 셋째는 기회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좋은 자료를 발견해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거고, 또 누구에게 어떤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기회죠. 다행히 외국 우표상들이 저에겐 직접 가져오기도 하고 정보도 줍니다. 제 경우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신용으로 거래가 되고 있어 구입하기가 쉬워졌어요.”
- 앞으로도 외국에서 들여와야 할 우표가 많습니까?
“우리나라 우표의 경우 90% 이상이 들어와 있는 형편이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 이회장께서는 구한국우표 전문가로 알고 있는데, 수집 범위가 구한국우표에 국한돼 있습니까, 아니면 현대까지로 넓은 겁니까?
"구한국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제가 그 동안 준비했던 작품 수가 30개 정도 되는데, 구한국 부터 현재까지의 보통우표는 전부 작품화돼 있습니다. 그 동안 각종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들을 보더라도, 전시첨쇄보통우표라든가 미군 정시기의 보통우표, 한국동란참전우표, 서울올 림픽, 한국의 항공우표, 한국우편엽서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 우리 나라 구한국 우표로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구한국 우표가 클래식우표로서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고 하겠는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당당히 자부를 해도 될 겁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내에 후배들로 하여금 이 상을 타도록 만들어 주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나라에서는 1세기에 하나 이 상이 나온 겁니다. 제가 죽기 전에 후배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영광을 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구한국우표를 가지고 그랑프리를 타려면 지금보다 100배가 넘는 자료를 투입해야 할 겁니다. 적어도 대금상 정도의 작품을 만들려면 10억원 이상 들 겁니다. 10억원을 투입하고 자료를 구입하고자 해도 자료가 없습니다. 그만큼 귀하죠.
개인의 이해관계를 따지면 이 상은 못 탑니다.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국가를 위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가능할 겁니다."
- 이회장의 그랑프리 수상으로 우리 나라 우취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했다고 하겠는데, 이회장께서 보는 한국의 우취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우취 지식이나 레이아웃 등에서 본다면 세계적인 수준이죠.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역사가 짧다는 점이죠. 역사가 짧다는 것은 귀한 자료가 그만큼 적다는 거죠. 서구에서는 1850년대까지를 '클래식'으로 보고, 심하면 1900년까지를 '모던'으로 보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경쟁을 포기하다시피 했죠.
이제 후배 한 사람만 더 따면 우리나라 우취 수준은 더없이 높아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 육성을 해야 하는데, 돈이 드는 일이니까 강제성을 띄울 수는 없죠. 그러니까 자꾸 사기를 북돋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후배 양성이라는 사명을 띠고 국제 무대에서 열심히 뛰겠습니다만, 후배들도 세계 우표전시회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 지금까지 각종 우표전시회에서 수십차례 수상하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미군정하의 보통우표」라는 작품인데 1945년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동안의 미군 통치기간에 발행된 보통우표를 모은 겁니다. 그때는 증정용 시트를 10개씩 만들었는데, 시트 뒤에다 10매 중 몇 호라는 도장을 찍었어요. 예를 들면 1호는 대통령에게, 2호는 국무총리에게주었다는 표시인 것 같더라구요. 그 도장이 아니면 몇매를 발행했는지 알 수가 없죠. 체신부기록도 없구요. 그런데 10매가 아니고 7매만 나온 것도 있었어요. 그 기간에 발행한 시트가 모두 21종인데, 그것을 세계우표전시회에 출품 해서 금상을 땄어요.
왜 이 작품에 애착을 느끼느냐 하면 1945년 이후에 발행된 우표는 '모던'으로 칩니다. 따라서 '모던'에 해당하는 작품이 금상까지 올라간 예는 아직까지 없었어요. 최고로 올라가야 대은상 아니면 금은상 정도죠. 그런데 1945년도 우표로 금상을 탔으니 후배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점에서 애착을 느끼는 겁니다.”
- 마지막으로 국제전 입상을 겨냥하는 후배 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 마디 해주시죠.
“국제전에 자주 출품을 하고 구경도 많이 해야 합니다. 작품 구성이나 정리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꾸 바뀌기 때문에 그 흐름을 빨리 타야 해요. 또 처음부터 금을 바라지 말고 동부터 시작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노하우나 테크닉이 쌓이다 보면 자동적으로 상이 오게 됩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서서히 나가도록 권하고 싶고, 우선 남의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