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사랑받는 미니 우체국
지금 전국에는 647개의 우편취급소가 문을 열고 있다. 서울만 해도 160개소나 몰려 있으며. 경인지역에도 84개소의 우편취급소가 요소요소에 들어서 있다. 우편취급소는 우체국을 이용하기가 불편한 지역의 주민에게 우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1983년에 최초로 설치토록 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편취급소의 설치 목적은, 우체국 창구의 전반 업무 중 일부를 일정한 자격과 시설 등을 갖춘 사람에게 일정 기간 동안 위탁함으로써 부족한 우체국 창구망을 정부의 투자 예산을 들이지 않고서도 효율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우정 서비스에 대한 지역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민 편의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편취급소는 위탁업무의 취급량에 따라 정부에서 지급하는 위탁수수료에 의거, 운영토록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우편취급소들은 실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사단법인 전국우편취급소연합회에 연락을 취했다. ‘서울시내 우편취급소 중의 한 곳을 방문해 보고 싶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서울 광나루터의 주민편의센터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구내를 빠져 나오자. 보도 위에는 노오란 단풍잎들이 깊고도 파아란 하늘 아래 누워 뒹굴며 가을의 서정을 한결 더해 준다. 얼마쯤 가슴을 틔워주는 널찍한 길을 따라 워커힐 쪽으로 방향을 잡자 ‘젊은 소장이 패기있게 일한다.’는 그 우편취급소가 이내 눈에 들어온다.「서울광장극동우편취급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서울성동우체국(국장: 김경석) 관내 광진구 광장동에 자리잡은 이 우편취급소에는 3명의 직원이 있다. 이호원 소장(37세)을 비롯해 창업 멤버인 김장희양, 그리고 막내뻘인 현소희양이 그들이다.
12평쯤 되는 우편취급소 안에는 카운터, 응접세트, 테이블 등이 놓인데다가 우편자루와 소포꾸러미들이 널려 있어, 손님이 한꺼번에 네 명 정도 들어서면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벽면에는 각종 우편업무에 대한 안내문이 가지런히 걸려 있고, 구석 한켠에는 탐스런 화분도 미소짓고 있다.
이 우편취급소에서는 특급우편물과 내용 증명, 별후납우편물을 제외한 모든 우편업무를 취급하고 있다. 또한 보험 모집과 보험료의 수납도 하고 있으며, 지방세·전화요금·범칙금 등의 제세공과금도 거둬 들이고 있다. 그리고 전신환·통상환 등의 우편환도 취급하고 있다.
이들 업무 중에서 취급수수료를 가장 많이 올리게 하여 그런대로 우편취급소 살림에 보탬을 주는 것은 등기우편물의 접수이다. 월 3,500 〜 4,000통을 접수하는데, 그 중 1,000여통은「코사리베르만」이라는 인쇄·방직기계 수입상에서 가져온다. 또한 의류·액세서리 판매점인「베비라화이자」와 워커힐 호텔도 매월 500여통씩의 등기우편물을 가져다 주는 단골 손님이다.
그 다음으로는 국내소포를 월 1,000건쯤, 국제소포를 월 100건쯤 접수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 달에 얻는 취급수수료가 200만원에, 그외 우표 판매수입이 50만원 가량 된다. 그러나 매달 인건비 120만원, 점 포 임대료 60만원, 통신비 및 기타 비용 30 만원 정도를 지출하고 나면 정작 우편취급소 운영자의 몫은 별로 없는 셈이다.
광장극동우편취급소의 주위에는 현대·극동·워커힐아파트 등이 포진하여 대단위 주거 밀집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세대수는 많지만. 그들 중산층 주민들이 우편취급 소에 요구하는 잡다한 까다로움에 비해 우편물은 양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일반우편물이라야 입대한 아들·동생과의 사이에 오가는 편지나 소포 등이 고작이다. 그밖에는 주로 제세공과금을 내러 이곳에 들른다. 그러나 제세공과금의 취급수수료는 그 일에 들이는 품삯에도 못미친다는 것이다.
이 우편취급소를 이용하는 주민은 하루에 적을 때는 150여명, 많을 때는 200여명에 이른다. 만일 여기에 우편취급소가 없다면 마을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몰고 서울구의 동우체국까지 나가야만 하는 주민들이다. 거리로야 2km 남짓 하다지만, 요즘 가는 곳 마다 교통난에 주차시설도 부족하여, 그 불편은 적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정책적 관심 아쉬워
경북 울진이 고향인 이호원씨는 나이가 들수록 학창생활보다는 사회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커갔다. 그래서 안동대 행정학과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자신의 남다른 부지런함을 밑천삼아 곧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맨처음 한때「별표 전축」으로 유명 했던 천우사에 입사했었다. 그 후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아 모 정당 지구당 사무국에서 일하기도 하고 식당 등에 야채를 납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인쇄판촉물 가게를 차려 누나 옆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누나 이옥자씨는 여직원 1명을 데리고 1989년 10월부터 우편취급소를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수시로 누나의 일을 거들곤 한 것이 이호원씨와 우편취급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1992년 11월에는 아예 누나의 우편취급소를 인수했다. 처음에는 우편취급소에 인쇄판 촉물 가게를 합쳐 함께 운영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분야가 점차 사양화되자 걷어 치우고 우편취급소에만 전념키로 했다.
우편취급소 소장이 된 이호원씨는 공공업무를 취급한다는 자부심에, 또 10년 이상 함께 살아온 이웃 주민들을 위한다는 보람에. 지극한 열의와 정성으로 매일매일의 업무에 임했다.
평일이나 토요일 업무시간 후에도 늦게까지 남아. 혹시 다급하게 찾아올지도 모를 손님들을 기다렸다. 손님을 거들어 우표도 붙여 드리고, 소포의 포장이 부실하면 다시 싸매 접수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팩시밀리 기능이 부가된 펜티엄 PC도 한 대 들여 놓았다. 문서 보내기. 일일마감, 우편환 송금 의뢰, 소액환 발행, 보험료 송부 등의 업무를 이 PC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화로 목소리를 높여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종전의 번거로움이 사라졌음은 물론 전신환 업무도 사고 없이 정확해졌다.
“나름대로는 일반 우체국에 못지않게 손님들에게 친절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또 손님들을 대하면 신바람도 났죠. 주민들이 취급소를 고마워할 때면 사명감도 생겼구요.”
그러나 요즈음 이호원 소장의 우편취급소에 대한 의욕은 전만 같지 못하다. 4년여 동안 변변한 수입이 없다 보니, 지난 날 사업을 하며 모아 두었던 예금 잔고도 거의 바닥이 나고. 이제 집안 생계를 위해서는 전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반 우체국의 온라인 업무를 우편취급소에서는 취급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평을 손님들로부터 이따금 들을 때면 우울해지기조차 한다. 우편취급소의 업무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손님들의 항의는 섭섭하기도 했지만, 이소장이 보기에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작은 우체국이라지만 예금을 안 받고 다른 데로 가라니 말이 되느냐? ’
‘예금도 안받는 우체국이라는데. 어떻게 믿고 우편물을 맡길 수 있느냐? ’
간혹 이와 같은 손님들의 날카로운 민원성 질책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편취급소제도의 발전에 대한 이소장의 바람은 매우 절실 해진다.
“우체국 점포망을 확장하여 국민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원래의 취지는 참 좋은 거죠. 그러나 대부분의 취급소들이 경영난으로 고전하게 됨으로써 그 뜻이 퇴색해 가는 느낌입니다. 기본 운영비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야 친절봉사나 청결한 시설도 기대할 수 있는 건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를 못해요. 인근에 다량 우편물을 고정적으로 내는 큰 회사 등이 몇 군데 확보돼 있으면 몰라도, 일반 주민들의 우편물만으로는 취급소의 유지가 어렵습니다.”
우편취급소는 그 운영의 묘를 잘만 살린 다면 공기업에서 추구하는 공공성과 민간기업에서 추구하는 기업성을 효율적으로 조화 시킬 수 있다. 동시에 국민과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최일선 단위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편취급소가 우정 서비스의 고도화와 다양화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대표적인 민간위탁제도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보다 애정어린 정책적인 배려와 함께 수탁자 스스로의 철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편취급소 제도와 우편취급소 운영의 목표가 주민의 편익에 있음이 합치된다면, 제도와 운영의 보조가 잘 맞을수록 그만큼 목표에 대한 성취도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