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친절은 사랑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깊은 휴식에 잠겨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사방으로 넓다랗게 치맛자락을 드리운 채 금만평야는 혼곤하게 누워 있었다. 포태와 출산을 거듭하면서 밭아진 숨결도 고르고, 뙤약볕과 큰비에 흐트러진 매무새도 가다듬으며, 호남 곡창의 중심부인 이곳은 지금 산후 조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다시금 새 봄에 파종할 풍요로운 꿈을 동진강물에 맑게 헹구면서.
그 꿈을 즈려밟고 전라북도 김제시에 도착했다.
작은 친절의 큰 위력
김제시 요촌동에 자리잡고 있는 김제우체국(국장: 안재엽)은 바깥으로 드러난 청사의 모습만으로도 무척 깔끔한 인상을 준다. 1994년 10월에 신죽한 새 건물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알뜰하게 청사를 관리하는 여문 손길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공중실의 한 켠에 마련된 휴게실에는 4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여러 조 놓여 있다. 우체국 고객들이, 혹은 우체국 직원과 고객이. 음료수 한 잔을 앞에 놓고 편안하게 담소할 수 있는 아늑한 자리이다.
그리고 카운터의 각 창구마 다에도 고객을 위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체신금융에 관한 상담이라든지, 시간이 다소 걸리는 용무라면 앉아서 차분히 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이런 점들이 다른 우체국에 비해 독특해 보인다.
'우리 국장님은 우체국의 모든 일을 직원들의 자율적인 처리와 자발적인 참여에 맡겨 주십니다. 그러니 웬만큼 불미 스런 일은 직원들을 믿고 내 색도 않으시죠. 그런 따스한 분위기가 직원들을 더욱 의욕 적이게 하는가봐요.'
우체국이 잘 꾸며졌다고 운을 떼자, 박순금씨는 안재엽 김제우체국장의 통솔방침에 대한 직원들의 호감을 이렇듯 소개 한다.
박순금씨(39세). 그녀는 김 제우체국의 80여명 직원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정보통신공무원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런 점은 전북체신청 관내에 서도 손꼽히게 되었으며, 마침내 본부에 추천되어 1995년도 친절왕으로 선발되게 된 것이 다
“저 정도의 친절이나 열의는 우체국 직원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저 운이 좋아 친절왕에 선발되었을 뿐 이어서, 다른 직원들에게 무척 미안합니다. 이번에 제가 누리게 된 영예와 혜택이 더 많은 직원에게도 돌아갈 수 있기를 빌며, 제 개인적으로는 직장생활의 한 반환점으로 삼겠습니다.”
친절왕 수상 소감을 이렇게 밝히는 박순금씨는 전주 기전 여고를 졸업하고, 1976년 12월 내장산우체국에서 임시직 교환원으로 일하게 됨으로써 체신부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981년 1월에 정규직 교환원이 되고. 1985년 11월에는 계리수로 환직하여 오늘날의 7 등급 계리원에 이르고 있으니. 그 사이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5세 때 우체국 직원과 결혼 한 박순금씨는 1986년 이래 10여년 동안을 줄곧 김제우체국에만 몸담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군산우체국 환금 계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중 소도시에 위치해 있어 그런지. 김제우체국에는 노인 손님이 많은 편이다. 할아버지 - 할머니 손님들은 출입문을 여는 일도 힘들어하고, 카운터 앞에 서는 일도 멋쩍어한다. 셈도 더듬고, 돈을 헤아리는 일도 서툴다. 심지어 고춧가루나 한 약재를 자루에 담아 와서는 “이 주소로 보내 달라.”는 경우도 있다.
얼핏 귀찮을 수도 있는 이런 노인 손님들을 박순금씨는 특별히 극진하게 응대한다. 반갑게 안내하여 친절하게 용무를 물은 뒤 성의껏 일 처리를 해 준다. 예금 혹은 보험에 관해 물어올 때나, 신상 문제를 끄 집어내 이것저것 긴 얘기를 시킬 적에도 상냥함을 잃지 않는다.
“참 친절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봐요. 마음 깊숙이에 자리한 사람 본연의 도리를 밖으로 꺼내 얼마나 실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창구 업무는 단순 작업에 가까운데. 그 일에 애정을 기울 이지 않는다면 매일매일이 따 분할 것은 물론, 손님들에게도 친절하기가 힘들죠.'
이같은 마음 씀씀이가 있기에,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단골 손님이 많다
그들 중 어느 노부부는 터미널 매점을 처분한 전재산 4,000만원을 가져와 “믿고 맡 긴다.'며 두고 갔다. 또 한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할아버지를 잃은 뒤 그 뼈아픈 보상금을 들고와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며 의논을 청했다.
박순금씨는 평소에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라지만, 할아버지 · 할머니 손님들의 입장에서 그녀의 싹싹하고 부드러운 응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박순금 씨는 어린이 손님을 응대할 적에도 정성을 다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간혹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유리접시, 주방 가위, 찬기세트, 비누세트 등을 사들여 선장품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선장품은 단골 손님에게보다. 생활 형편이 낮은 고객에게 돌아가는 수량이 더 많다고 한다. 어느 동료 직원의 귀띔이듯, 그녀의 장점은 이런 데에 있다. 모든 손님을 내 부모 · 형제처럼 여기되, 빈부와 노소의 차별을 두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씨로 대한다는 것이다.
“저는 온갖 사람과의 만남을 모두 소중한 인연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한 손님에게도 소홀할 수 없는 거죠. 사업을 위 해서는 벼락치기 실적도 없을 수 없지만, 그보다는 여러 손님들과 유대를 맺어 앞으로 지속적으로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사업은 은근히 추진하며. 또 멀리 봐야 합니다.'
모든 만남이 소중한 인연
박순금씨는 예금보험계에서 제세공과금을 담당하는 김제우체국 직원이면서 중3, 중1에 재학중인 남매를 둔 주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족 사랑, 이웃 사랑을 생활 신조로 삼아. 건실한 가정의 토대 위에서 직장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저는 동료 여직원들에게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주방에서 반찬을 만들 때 조미료만 넣을 게 아니라 지극한 사랑도 한 움큼씩 넣자구요. 주부가 쏟는 애정의 양만큼 아이들도 잘 자라고, 집안도 화목해지는 것 같아요.”
직장인인 박순금씨에게 있어 이웃 사랑이란 다름아닌 우체국 손님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또 그 사랑은 반대급부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체국에는 전화요금고지서를 분실한 채로 청구액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요금을 내러 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한창 바쁜 납기일에 일일이 전화국에 문의하여 금액을 확인 한 뒤 수납하기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이런 경우에도 친절한 응대는 물론 업무 처리에 열의를 다한다. 애써 찾아온 손님을 전화국으로 돌려세우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편의를 위하고, 일과 후까지 정리해야만 하는 번거로운 일거리지만 이를 떠맡음으로써 우체국의 세입을 돕는 것이다. 아니, 무슨 일이든 편리하게 처리해 준다는 우체국 이미지를 은연중 손님들에게 심는 것이다.
지난 1993년에 방송통신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로 근래 그녀는 제법 여가 시간이란 걸 누리게 되었다. 그 덕분에 교회 성가대에도 참여하고, 좋아하는 서점이나 음악사를 자주 찾는다.
서점이나 음악사에서는 친숙 한 우체국 손님과 이따금 마주치는 수도 있다. 그럴 때 박순금씨는 다가가 '하나 골라 보세요.'하며 책 또는 CD를 그 손님에게 선물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같은 ‘쉽지 않은' 호의에 감복한 손님들은 훗날 우체국에 찾아와 그녀에게 말한다. “보험 모집할 때 안됐나? 언제든 필요하면 말만 해.”라고.
박순금씨는 하루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늘 신중하고, 사람을 너나없이 존중하고, 모든 일에 사랑이 넘치게 하고 싶은 것이다. 매일을 그렇게 보내건만, 밤에 일기장을 앞에 하고는 ‘오늘도 잘못 살았구나' 하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창구 업무를 맡다 보면 실수가 따르게 마련이죠. 일이 잘못 됐으면 그 즉시 깍듯한 사과를 드릴 수 있는 게 진정한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미진한 구석이 있으면 저는 집에 돌아와서도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꼭 양해를 구합니다.'
김제우체국의 강은주 창구계장은 박순금씨와 20여년이란 근속기간도 비슷하고, 연배도 비슷하며, 주부 직장인이라는 처지도 비슷하다. 또한 강계장은 박순금씨를 1995년도 친절왕으로 추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박순금씨를 바라보는 강계장의 평소의 속마음을 들어 보았다.
“박순금씨는 어느 조직에서든 눈에 뜨일 만한 보배입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인간미가 넘치기 때문에, 그녀 앞에 서면 모두가 가족 같아 보입니다. 하다못해 외판원에게도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 묘한 특기를 가졌어요.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죠. 특히 동료들 사이에서는 윤활유, 상사와 직원들 사이에서는 징검다리와 같은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