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 긴 여정을 시작하다
결혼 후 2006년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쥬디 정(Judy Jung) 씨는 영국에 있는 재영문화예술인협회에서 한국의 문화예술보급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공이 무용이기도 하고 관련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한인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2008년 캠브리지대학 초청으로 런던대학교에서 이철진 선생의 승무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43분 승무공연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은 충격에 가까웠다. 공연을 함께 관람한 현지인들도 승무를 보고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하고 많은 질문을 해 왔지만 제대로 답변해 줄 수 없었고 그날 이후 승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승무. 승무라는 춤에 내제된 한의 깊이는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그 깊이를 춤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배우기만 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2008년 공연. 저는 무대 뒤 커튼 사이로 보고 있었는데, 정갈한 한복과 옷의 선에 처음부터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요. 마치 천사를 보는 듯했지요.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이어졌고 제가 예술인협회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게도 많이들 승무에 대해 물어보더라고요. 공연 후에 결심을 했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2010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바로 이철진 선생님께 전수를 받기 시작했죠.”
2010년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남편의 지원과 응원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승무를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긴 배움의 시간이 어느덧 횟수로 4년 차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녀만의 춤을 찾고 있다. 이철진 선생에게 전수받고 있는 승무는 한명숙류 승무인데 익히 알려진 이매방류 승무와 더불어 전통무용가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故 벽사 한명숙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그녀가 생전 전수했던 승무는 남색치마에 흰 저고리, 흰 장삼을 걸치며 머리에 흰고깔과 어깨에는 붉은 가사를 매고 양손에는 북채를 드는 것이 특징이다.
장단은 염불에서 시작해 반염불, 삼현타령, 느린 허튼타령, 중 허튼타령, 굿거리로 이어지다 자진굿거리로 끝을 맺는다. 장단이 빨라지면 북과 춤이 함께 절정에 이르게 된다.
“승무에는 20분 추는 춤과 43분 추는 춤이 있는데 지금 저는 20분 승무를 전수받고 있어요. 승무를 전수 받기 시작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알면 알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은 것들이 자꾸만 나오는 춤이 승무입니다. 제가 무용을 전공했고 오랫동안 강의도 하고 학원도 운영해 봤지만 승무나 살풀이는 욕심으로 하는 춤은 아닌 것 같아요. 이 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공들인 만큼 나타나는 그런 춤이죠.”
전수와 공연을 이어가며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승무의 길을 묵묵히 찾아가고 있다.
그녀가 춤을 춘다. 하이얀 고깔 속에 숨겨진 눈빛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제된 표정으로 승무가 시작되었다. 긴 장삼 속 손에 들린 북채가 긴 장단에 흐트러짐 없이 장삼을 놀린다. 장삼이 하늘로 퍼지듯 올라가더니 한참을 머물렀다가 천천히 내려온다. 장삼 끝자락이 하늘로 올랐다가 처지는 형태에 호흡을 싣고 절규를 담는 것이다.
“승무에서 호흡은 생명과 같아요. 12박자 동안 호흡을 멈추어야 흔들림 없이 춤을 출 수 있지요. 장삼을 원하는 만큼 던지기 위해 힘 조절도 해야 하고요, 호흡과 힘의 정도를 맞추고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단에 맞춰 움직이다가 멈추고 또다시 움직이다 멈추기를 반복할 때마다 관객의 숨도 멈추었다 내 뱉기를 반복한다. 한쪽 발을 들고 단단히 감싼 나머지 버선발로 몸을 돌리며 장삼을 휘감아 돌릴 땐 머리가 아찔했다. 그 긴 시간 동안 호흡을 지배하는 춤. 그것이 승무였다.
세상사 번뇌를 푸는 춤
보는 사람의 액운을 풀어주는 춤
그리하여 관객의 춤이 되는 승무.
그녀는 오늘도
장삼을 흩날린다.
내려놓지 못한 자들을 위한 춤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있다면 공연은 시작된다. 모든 객석이 가득 찬 공연장보다 단 한사람의 관객 앞에서 하는 공연이 긴장감이 높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펼치는 공연은 고도의 정신력을 요하는 소통의 과정인 것이다.
“승무는 추는 사람의 춤이 아닙니다. 보는 사람이 액운을 풀고, 풀리지 않는 한을 내려놓게 하는 춤이지요. 그래서 승무는 보는 사람, 즉 관객의 춤이 되는 거예요. 저의 춤을 보고 우시는 분도 많아요. 지금껏 놓지 못하고 쥐고 있던 번뇌를 내려놓게 된 거죠.”
쥬디 정은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승무를 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고 무용가의 몸짓과 북소리와 하나가 되어 고뇌를 날려버리길 바라는 것이다.
무용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운명처럼 자신을 이끈 승무와 살풀이로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고 싶은 것이 쥬디 정의 꿈이다. 전수받고 있는 전통무용을 완성하는 것이 꿈이어야 할 것만 같지만 삶의 궁극의 목적은 봉사에 있다고 한다. 재능을 나누는 삶과 고뇌를 나누는 춤. 그녀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
“제가 지금 승무와 살풀이를 전수받고 있지만 어느 정도 하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정해진 끝이 아닌 끝없이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종교가 불교여서도 그렇지만 사찰이나 혹은 저를 원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가 지금 전수받고 있는 춤을 통한 봉사를 하고 싶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지원으로 올해도 4월부터 성균소극장에서 승무공연을 만날 수 있다. 4월부터 6개월 동안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아직 올해의 공연명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승무공연을 보러와 주길 희망한다. 행복한 사람들이라도 생활의 영감을 얻고, 지친 사람들에겐 용기와 희망을 주는 공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4월 삶의 번뇌에 지친 사람들은 봄날의 쥬디 정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