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장 원광식 씨
이런순간 말은, 글은 가난해진다. 도저히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깊고 맑은 종소리이다. 고요하던 호수를 시나브로 가득 메우는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종소리를 따라 장인의 얼굴에도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이맑은소리, 언제들어도 심상이 밝아집니다. 종소리는 30리를 간다고 하지요. 가까이서 듣는 이나 멀리서 듣는 이나 마음이 맑아져요. 소리가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데, 저승에까지 가닿는다는 말이 전해지지요. 범종이 울리는 시간만큼은 지옥문이 열려서번뇌하는 영혼을 위로한다고도 합니다. 어렵게 완성한 종을 칠 때의 기분은 장인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 기분은 우주를 다 준다해도 바꿀수 없어요.”
주철장 원광식(66세) 씨. 좋아하는 일을 만나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린 장인의 열정은 현재진행형이다. 49년을 관통해온 열정은 1,200년 전 울리던 한국의 소리를 되살려 냈다. 맥이 끊겼던 전통의 밀랍주조 공법을 재현해낸 그는 밀랍주조 기법을 사용해1992년 일본 시마네현 광명사에 있는 신라 종을 처음 복원했다. 2005년에는 통일신라시대(800년경)에 만들어진 선림원종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선림원종은 월정사에 옮겨져 보관돼 오다가 한국전쟁 중 불타 파손됐다. 선림원종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그 소리가 빼어나기로 이름이 높았던 신라 종들은 모두 밀랍주조공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공법이 완전히 소멸돼 버린 상태였다. 밀랍주조공법은 밀랍으로 종의 모형을 만들고 외부에 주물사토로 거푸집을 만든 뒤 열을 가해 밀랍모형을 제거한 후 청동쇳물을 붓는 공법이다.
“만드는 이의 정교한 솜씨가 그대로 살아나는 기술이 밀랍주조공법이지요. 10여 년간 일본으로 유출된 신라∙고려∙조선시대의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연구했어요. 신라의 종은 옥돌가루로 거푸집을 만드는데, 그것은 통기성과 내화성이 강해서 주물이 잘 나와요. 신라 종은 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인데, 오늘날사용하는 모래 거푸집으로는 이를 복원할 수 없지요. 고려 종은 황토에 모래를 섞어 만드는데 신라 종보다는 못하죠. 높이가 1m80㎝인 상원사종은 만드는데만 꼬박 7년이 걸렸어요. 상원사종은 에밀레종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으로 내가 그 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범종은 크면 소리가 맑기 어려운데, 우리 종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특징이고 상원사종은 내가 들어 본 중 으뜸이라오.”
원광식 씨는 종의 수명은 천년 정도인데, 거의 다 깨져서 복원이 힘든 전통의 종을 복원해 다시 천년의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의 기쁨은 또한 장인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년의 소리를되살린 그는 2001년 대한민국 명장과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로지정되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종만도 오대산 상원사범종, 광주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조계사종등 7,000개가 넘는데 그의 명성은 국경을 넘어 중국 북경 대종각에서는 그를 기술고문으로 위촉했으며 태국 왕실과 일본의 유명 사찰에도 그의 종이있다.
“이젠 소리를 들어보면 종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고 잡소리가 나면 종이 얇고 균형이 깨졌다는것이지요.”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은 그의 나이 열일곱에 시작되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나고 자란 장인은 자동차 기술을 배우려고상경했다가종을만드는 8촌형을 만나그기법을배웠고 1962년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일에 투신했다. 6년 뒤 결혼한 지 석 달만에 스물여섯의 새신랑은 시련을 겪는다. 종을 만드는 외형 틀이무너지면서 흘러나온 쇳물 한 방울이 그의 오른쪽 눈에 들어갔고하루아침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 2년 여간 방황을 했으나 늘 종소리가 그의 주위를 맴도는 환청을 들었고 다시 종으로 돌아왔다. 시련을 견딘 장인의 의지는 갈수록 견고해졌고 종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혼신을 다해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적인 주철장인이 되었다.
“이르면 내년 쯤 에밀레종을 복원할수있을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에밀레종은 노화가 심해서 예전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하고 녹음된 기계음만 들을 수 있을 뿐이지요. 그동안 학계와 문화재청에서 복원 노력이 있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혼이 깃든맑은소리를다시 살려내야지요.”
장인은 충북 진천군 덕산면 합목리에 2.5t짜리 용광로 22개를 갖춘 명실공이 세계 최대규모의 성종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가복원한 200여개의 종들은 2005년 9월 개관한 진천군 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종을 향한 그의 열정은 이렇게 알찬 사랑의 열매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