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거문고 솜씨가 빼어났던 백아는 행복했다.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친구 종자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의 벗이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백아절현(伯牙折絃)의 옛이야기이다. 우리네 소리판에도 종자 기와 같은 이들이 있어 백아 와 같은 소리꾼은 외롭지 않다. 바로 판소리의 감상 능력을 제대로 갖춘 이로써 흐드러진 추임새로 소리판의 신명을 확장하는 귀명창이다. 다만 그 판이 성하지 못하니 그들의 활약이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조금씩 뿌리내려가고 있는‘귀명창대회’를 만나는 일은 반갑기 그지없다.
2009년으로 방송 25년을 맞는 KBS 1FM(93.1㎒)의 국악 전문 프로그램 <흥겨운 한마당>에서 지난 2005년부터 펼쳐온「21세기 귀명창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김은정 씨는 국악 전문 PD로 15년의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다.
“2003년에 판소리가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어요. 2004년에 기념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리를 들을 줄 아는‘귀’를 가진 이들이 숨어버린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오랜 시간 검증된 좋은 우리 음악, 향기로운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어요. 소리꾼을 북돋우고 때로 호되게 꾸짖는 진정한 관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귀명창대회를 만들었습니다. 올해로 8회째를 맞았는데 11월에는 연말 대회도 열었지요. 귀명창은 있어도 귀명창 대회는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전국의 인재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쁨은 고마운 일이지요.”
판소리 상식 겨루기, 추임새 넣기, 판소리 평가하기 등으로 진행되어온 귀명창대회에서 김 PD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소리의 고장인 전주, 진주, 경주, 광주, 진도 등지에서 대회를 열면서 취미 이상으로 삶의 갈피 갈피에서 깊이 향유되어온 풍류문화와 소리를 즐기는 사람만이 자아내는 기개를 진하게 느꼈다고 한다.
“귀한 우리 소리가 담긴 LP, SP를 수백 장 간직하고 있는 학원 강사도 있었고, 소리꾼이었던 아버지를 외면하고 목사가 되신 분도 계셨어요. 그분은 오랫동안 소리를 등졌었지만 결국 피의 울림이 있었는지 다시 소리로 돌아오셨고 연말 대회장원에까지 오르셨죠. 흔히 우리 음악을‘한의 음악’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한을 풀어내고 신명을 만들어내는 소리죠. 카타르시스가 있는 흥의 마당인 겁니다. 또 우리 소리가 펼쳐지는 무대는 일방적 무대가 아니라 서로 교감하는 사랑방 대청문화였어요. 소리 하는 이와 듣는 이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 어울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런 소리판을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 안타까워요.”
“수제천이나 시나위같이 영혼의 위안을 주는 음악을 모르고 죽는다는 건 너무나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종다양한 세계의 음악을 접할 수 있어 음악적 소리가 풍부한 세상이지요. 그렇지만 자기 소리의 원형질을 잃고 편린만 남아있는 사회는 얼마나 불행한가요? 우리 소리를 듣게 되면 자연히 전통의 생활풍습, 사상 등으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갑니다. 일제 강점기 등 역사의 질곡 속에 변형되고 그 흐름이 끊겼던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매일매일 국악을 접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저는‘매일 보물상자를 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국악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김 PD는 국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으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국악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60여종의 음반을 제작해왔다. <창작 판소리 다섯 바탕전> <한국인의 기쁜 날 우리 노래> <엄마와 아기를 위한 우리 음악> 등이 있으며, 1999년 제작한 <21세기를 위한 한국의 전통음악 시리즈 음반>은 한국 방송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정악(正樂)부터 퓨전국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는 것도 국악의 판을 넓히려는 그의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국악이 수많은 음악 가운데 또 하나의 사랑받는 음악으로 자리 잡길 바랍니다. 귀명창을 위한 좋은 판을 만들어서 공명정대한 경연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고 싶어요. 어린이, 대학생 등 자질이 있는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면 소리꾼의 역량은 더 커지겠지요.”
낮고 다정한 음색 속에 숨길 수 없는 열정이 가득한 김 PD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마저 벅차게 한다. 그 열정의 뿌리는 국악에 대한 사랑이리라. 다시, 보물상자를 열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풍류 한 자락 묻어나는 진양조 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