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에게 삶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하던 그 날부터 꼬마 성철의 일상은 매일이 꽃으로 피어났다. 그 꽃이 장미건 라일락이건 개나리건 냇가나 논둑에 핀 이름 모를 잡초 꽃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흥에 겨운 식물들이 제 분수에 맞는 꽃을 저마다 흐드러지게 피워내듯 성철도 그만의 꽃을 피우기시작했다.
집배원 김우정이 아버지를 대신해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당장의 성철은 몰랐다. 조부의 얼굴이 검게 변하던 그 날, 조부는 우정과 함께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어린 성철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몰라도 좋았을 진실을 성철이 알아버린 것은 일년여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다음이었다.
지금껏 받은 아빠의 편지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빠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은 실로 컸댜 그러나 성철은 모른 척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빠로부터의 편지는 그 뒤에도 이어졌고 성철은 아빠의 편지를 그렇게 계속해서받았다.
진짜 아빠가 아니라는 생각에 알 수 없는 허탈함이 들기도 했다. 그 한편으로 아빠의 편지를 전해주는 집배원 아저씨가 진실로 자신의 아빠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우정은 조금씩 어린 성철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아빠와 아저씨 사이를 넘나드는 우정을 가까이에 두고 성철의 상처와 슬픔은 희석되어갔다.
그 시절의 성철에게 아빠의 편지는 위안이었고 힘이었다. 그리고 그의 짧은 인생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집배원김우정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우정만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일이다. 가짜 아빠 노릇을 하면서도 어린 성철 앞에서는 아무 상관 없는 그저 집배원 아저씨인 양 굴었다. 성철은 일찌감치 철이 들었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집배원이 되겠다는 꿈. 그리움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우정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댜 지나간 일들을 들추자면 새록새록 그립고 미소가 얼굴 한가득 들어찼다. 가진 것은 비록 가난과 아픔뿐이었다지만 우정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성철은 누구보다 행복한 아이였다.
성철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흐뭇한 얼굴을 하다가도 술잔으로 떨어지는 우정의 하염없는 시선이 영 마음에 걸렸다. 장난처럼 큰 고기쌈을 보란 듯이 한입에 욱여넣고 성철은 눈물을 찔끔거렸댜
"그러다 체하겠네. 조금씩 천천히 먹어."
우정은 성철의 등을 두드렸다. 아직도 그에겐 꼬마 성철인양
"아빠."
목에 걸린 고기쌈을 꿀꺽 삼킨 성철이 우정을 불렀다.
"아빠, 맞잖아요. 실은 예전부터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성철은 배시시 하고도 화사한 웃음을 날렸다. 너무 화사해서 금방이라도 시들어버릴 것 같은 꽃웃음이었다.
"알고 있었던 거야?"
성철은 그만한 것도 몰랐겠느냐는 식으로 또 피식 웃었다.
"아빠가 있어서 난 진짜 행복했는데…… 지금도 진짜 기분 좋은데…… 아빠는 영 좋은 얼굴이 아니네요. 우체국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님 집에?"
"널 만나서 감격스러워서 그러지. 자 봐, 이렇게 웃고 있잖아."
우정은 과장된 소리로 껄껄거렸다.
성철이 조부의 마을을 떠난 이후, 우정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하리의 교육을 핑계로 고향을 떠나왔고 아내 정연을 하늘로 떠나보냈으며 하나밖에 없는 딸과 냉전을 치르는 중이다.
모처럼 만난 성철 앞에 뼈아픈 속내를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우정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라면 성철이 먼저였고 그동안의 마음고생이라면 우정보다 그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 했을 리 없었댜
성철이 꼬마였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정은 그의 머리를 흔들어 쓰다듬었다. 만개한 빛꽃처럼 흐드러지게 대문니를 드러내고 껄껄거렸다. 그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창밖에는 어둠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있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거나하게 취한 우정은 초인종 대신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직접 눌렀댜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니 있어야 할 하리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는다. 가슴이 철렁하고 알코올은 화들짝 휘발되었다.
여태 들어오지 않았단 말인가. 우정은 헐레벌떡 신발을 벗고 하리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없다. 이 시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당장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 했다. 어디서 뭘 하느라 이 시간이 되도록 귀가하지 않는 거냐고 호통을 쳐야 했다. 막상 휴대폰을 손에 든 우정은 주저했댜 냉랭한 하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대폰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한 채 우정의 상념이 근심과 걱정을 타고 깊숙이 빠져들었다.
혹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말썽이라고는 도통 모르던 하리를 자신이 망쳐 놓은 것은 아닌가. 못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발작하듯 우정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나온 것은 그때였다. 방안의 적막과 우정의 근심을 깨고 휴대폰 벨소리가 점령군처럼 침투했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분명 하리다. 우정은 서둘러 받았고 다급하게도 말문을 터뜨렸다.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싸돌아다녀. 어서 안 들어와!"
우정의 성난목소리가수화기 저편으로거침없이 건너갔다. 그리고 저편에서 들려온 건 땅 꺼지는 한숨 소리. 하리가 아니다. 유괴범인가. 무서운 생각은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갔다. 우정은 누, 누구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들려온 목소리는 해자의 것이었다.
"하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 아뇨. 잠깐, 요 앞에 뭘 사러 나갔는데 안 들어와서요."
우정은 또 실없이 웃음을 남발했다. 해자의 걱정까지 살 수 없음에 현관문을 열었다 닫는 연출음을 냈다. 그러고는 지금 막하리가 들어왔다고 해자를 안심시켰다. 그 와중에도 해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또 다른 걱정이 드리웠다.
뭐 하느라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요새 통 전화 한 통화가 없다."
하리를두고하는말이었다.
"제 딴엔 공부가 많아서 그런 모양인데 내가 일러둘게요. 할머니한테 전화 좀 하라고."
"그럴 것까진 없다. 그나저나 하리는 들어온 거 맞지?"
"이젠 아들 말도 안 믿어요? 언제 주말에 시간 내서 한번 찾아뵐게요.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푸욱 주무세요. 밤이 깊었어요."
"별일은 없는 거지?"
"아무렴, 진짜 아무 일도 없다니깐…… 모처럼 고향 사람을 만나서 술 한잔 했어요. 하리가 나 술 깨는
약이라도 사온다고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이야."
별일 아니라고. 우정은 한 옥타브 올라간 음성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풀죽은 해자의 목소리에 마음은 또 심란했다. 혼자서도 잘 지낸다고 걱정 말라던 해자의 의연함이 전연 느껴지지 않았다. 어수선한 집처럼 우정은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나지않았다.
당장은 하리에게 전화부터 해야 했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우정은 근심과 걱정으로 초조하게 서성였댜 메모는 책상 위에 있었다. 진즉에 발견하지 못한 하리가 남긴 메모. 당분간 친구랑 같이 지낼 거야. 걱정은 안 해도 돼.
다른 말이 더 있지 않을까 싶은 우정은 메모지를 뒤집어보았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정은 명했다.
정연이 곁에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줬을 것인가.
우정은 '여보' 를 되뇌었다. 천장이 아득하게 다가오는 우정은밤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식 하나 키운다는 게 이토록 힘겨운 일이던가.
정연이 살아있던 때는 전연 실감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리에게 남동생을 만들어주자고 능청을 떨었다. 혼자 남고 보니 하리 하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함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연의 시샘을 살 정도로 다정했던 부녀였음에도 속을 썩자니 자식 서넛을 혼자 돌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해자도 자신을 키우는 일이 이토록 힘들었을까. 살면서 위안이 되기도 했을까. 뜬금없는 우정의 상념이 또다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갔다. 집배원이 되어 나타난 아들과 마주한 해자는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자와 함께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었음에도 우정에 대한 그녀의 불만은 종종 불거져 나왔다. 학교와 군 생활로 해자와 떨어져 있는 동안 우정의 걱정은 해자에게 있었다. 그녀의 건강도 건강이거니와 자신을 키우느라 평생을 홀로 보냈다. 고향을 떠나자면 우정을 따라 나서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집배원은 해자와 함께 있기 위한 방법이었고 선택이었댜
해자의 속내는 오리무중이었다. 다 큰아들이 곁에 있어서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매일 마주하는 우정을 보기 싫다며 눈총을 쏘아댔다. 장정이 된 아들의 힘을 당해낼 재간도 없으면서 그녀의 말에 어깃장이라도 놓을라치면 해자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 왔다. 지금의 우정처럼 해자도 힘겨운 고비를 넘고 또 넘어왔을 터였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해자는 밤마다 우정 몰래 누군가에게 글을썼댜
우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면 비밀스러운 일처럼 해자는 조심스럽게 편지지와 볼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우정이 모르길 바랐겠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해자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있었다. 한밤중 소변이 마려워 방문을 나서자면 해자의 방문으로 불빛은 훤히도 새나왔다. 우정은 해자 몰래 방안을 엿보았다. 뭔가를 적는 일에 열중해 우정이 훔쳐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기를 쓰나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고 일기라면 굳이 편지지에 쓸 필요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누운 우정은 궁금증만 키우다가 결국은 잠이 들었다.
언젠가 한번은 우정이 출근을 하기 전 해자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그거줘요."
"그거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뭘 달라는 거야?"
"간밤에 쓴 편지 달라고…… 출근길에 부쳐 줄 데니까."
"내가 언제 그딴 걷 썼다고그래? 부칠 편지 없으니까 어여, 출근이나하셔."
해자는 시치미 뚝 이었다. 간밤의 일에 더욱 호기심이 발동한 우정이었다.
"엄마,연애해?"
그게 무슨 허튼소리. 해자의 눈썹머리가 매섭게 올라섰다.
"이해해. 난 다 이해한다니까. 그나저나 새 아빠는 언제 소개해줄거야?"
빗자루가 아닌 몽둥이가 해자의 손에 쥐어졌다.
"아니면 말고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어째 더 수상해."
우정은 몽둥이를 피해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
"그놈의 입, 어디 한번만 더 놀려봐."
그러나 해자는 한번을 제대로 매질하지 못했다. 기력만 소진하고 토방에 털썩 주저앉았댜 밤마다 쓰는 글에 대해서는 함묵한 체였다. 그러는 넌 대체 언제 털어놓을 작정이냐. 몰래 연애하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언제 손주를 안겨줄 거냐. 얼굴 한번 보게 데려와라. 해자는 우정을 물고 늘어졌다.
성철에게 쓰는 가짜 아빠의 편지를 오해해서였다. 우정이 어딘가에 자식을 숨겨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농담을 진실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나야말로 다 이해한다. 피 끓는 혈기에 저지른 일이래도 책임은 져야지. 명색이 네 자식인데……."
‘내 아들 성철에게'로 시작하는 우정의 편지를 훔쳐봤을지 모를 일이었다. 해자가 누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냐고 물을라치면 우정은 대단한 비밀처럼 알려 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편지를 등 뒤로 감추며 고백은 엄마가 먼저라고 변죽 울렸다. 해자와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이어졌던 가짜 아빠의 편지들을 성철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다. 아빠의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으면서 성철은 천연덕스럽게도 연기했다. 생선을 입에 문 고양이처럼 편지를 손에 들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내뺐다.
해자의 편지는 의문 덩어리였다. 누구에게 쓰는 것인지, 그 편지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우정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볼펜을 손에 쥔 해자가 아무것도 없는 벽과 마주하고 있으면 우정의 마음은 괜스레 먹먹했다. 홀로 눈물을 훔치다 우정에게 들켜 멋찍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끝내 편지를 부쳐달라는 부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정 몰래 버스를 타고 나가 편지를 부치고 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편지가 아니라면 소설이라도 쓰고 있는 건가. 한번은 대학노트를 사다 안겼다. 노트를 받아든 해자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우정을 쳐다보았댜 이런 걸 왜 주는 건데, 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줬어. 필요하며 엄마 쓰라고. 필요 없어? 그러면 도로내놓던가."
"아니다. 두면 또 쓸데가 생기겠지."
해자는 노트를 챙겼다. 그녀의 글쓰기는 밤마다 계속되었다.
모자지간에 비밀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투덜거려도 보았지만 해자는 ‘엄마의 비밀'이라며 함구했다.
해자의 글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정의 결혼식이 있기 전날까지 이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날 이후로 우정은 해자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더는 보지 못했다.
경쟁하다시피 무슨 대단한 비밀을 간직한 이들처럼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종이와 씨름했다. 총각 김우정이 가짜 아빠가 되어 쓰는 편지는 그야말로 엉터리였다. 아빠를 잃은 소년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공상소설을 쓰듯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쓰기도 했고 어떤 때는 성철과 그 날 있었던 일을 자신도 모르게 옮겨 적기도 했다. 아빠가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 수 있는 흔적들로 가득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리 어린 성철이라도 가짜 아빠의 꼼수를 다 알아차렸을 터였다. 하리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지난날의 상념들이 뜬 눈으로 있는 우정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해집고 다녔다. 하루라도 휴가를 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나더니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네."
"내가 행복해야 일을 해도 즐거운 거야."
"이참에 딸과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그래?"
"드디어 좀비가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모양이네. 앞만 보고 달리다간 중요한 걷 홀리고 오기 십상이지. 뭘 홀리고 왔는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돌아보라고."
"휴가 정도는 찾아 먹으면서 살아야 그게 정상인 거지."
휴가를 냈다는 말에 영미뿐 아니라 동료 집배원들은 김우정이 이제야사람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한마디씩 덧붙였다. 집배원이 되어 처음 우체국 출근을 하던 그때, 우정은 날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뿌듯했다. 그 다음엔 우편물을 실어 나르며 낯선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친밀해지는 그것이 좋았다. 우정이 오는 때를 기다려 농기구를 봐달라는 그들이 가족처럼 여겨졌다. 언제부터인가는 마을 어귀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우정의 집배원 생활은 그렇게 일년이 가고 삼년이 가고 강산이 변한다는 그 십년을 두번이나 넘긴 천직으로 남은 지 오래였다.
이제 와 다른 것을 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격세지감에 앓는 소리를 달고 산다 해도 그 시절로 되돌아가자면 우정은 또다시 집배원이될터였다.
휴가를 얻은 당일 우정은 습관처럼 출근준비를 했댜 운동화를 챙겨 신는 무렵에야 휴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어진 사라진 기분이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왠지 어색하고 이상했다.
평생을 다닌 직장을 퇴직하고 맞이하는 새날은 앓던 이가 쑥 빠진 것처럼 홀가분한 날이 아닐 것이다. 갈 곳을 잃은 막막함과 허탈함이 카팻처럼 바닥에 깔릴지 모를 일이다. 하루 동안의 휴가라서 다행이란생각이 드는우정이다.
느긋하고 이상한 아침을 즐긴 우정은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집을 나서던 날들과 오늘은 달라야 했다. 되도록 산뜻한 옷을 꺼내 입을 참이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안주인이 없다는 것은 옷장에서도 티가 팍팍 났다. 과거의 시간들이 퇴색한 옷들과 함께 옷장 안에 묻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앨범에 보관된 사진들이 그랬고 신지 않는 신발장의 운동화가 그랬고 방문자의 댓글이 달리지 않는 블로그가그랬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의 오전. 새삼스런 풍경들은 집안에 있었고 잊었던 생각들이 우정을 일깨웠다. 하리를 만나러 가자면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한다. 긴장과 설렘은 실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손님이었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